올해의 판결을 정리하며 |
전직 대통령 두 분의 서거, 미네르바 구속, 미디어법 강행처리, 정부의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논란. 2009년은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법원이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형사사건 무죄와 함께 해임처분이 잘못됐다는 판결을 받았고 미네르바도 무죄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사장 출근저지 투쟁으로 해임됐던 YTN 기자들도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용사 참사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조두순 사건에선 아동성폭행범의 적정한 형량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준 판결도 있었고,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 판결도 있었습니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판결들을 <올해의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2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공권력의 일방 통행에 제동을 건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기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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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연주 해임 위법"...이명박표 '법과 원칙' 흠집- 정연주 전 KBS 사장 무죄, 해임 취소 판결
2008년, 사장 임기제를 무색케 할 정도로 속전속결로 KBS 사장이 해임되었다. 감사원이 뉴라이트 쪽의 요청으로 특별감사를 실시한 후 꼭 두 달만인 8월 11일 정연주 당시 사장은 해임통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 11월 정 전 사장이 낸 해임무효 소송에서 대통령에게 "위법한 해임처분을 취소하라"고 주문했다. 이 판결 때문에 이명박표 '법과 원칙'은 상당한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
법원은 우선 해임처분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했다. 정 전 사장에게 처분 내용 등을 미리 알리고 의견 제출 기회를 주는 등 사전통지, 청문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또한 해임처분시 법적 근거나 사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도 위법하다고 보았다.
법원은 해임사유를 놓고 정 전 사장이 적자경영 등 일부 경영판단의 실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KBS 사장 임기제는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어서 해임 기준은 다른 공공기관보다 높게 해석하여야 한다"며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위법한 해임을 취소하라"고 판시했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형사법정에서는 업무상 배임죄로 기소된 정 전 사장이 무죄를 받았다. 검찰은 "정 전사장이 조세 소송 과정에서 국세청과 조정을 하는 바람에 KBS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역설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KBS가 조세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 각종 비용을 지출하면서 국세청과 다투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이고 "법원이 승인한 조정안을 놓고 어느 일방에 배임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검찰의 기소가 무리수였음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현재 두 사건 모두 항소심 진행중이다.
2. YTN 낙하산 사장 반대투쟁 공익성 인정- 출근저지 투쟁 기자들 "해고 무효" 판결 ... 형사사건은 "유죄"
KBS 사장에 이어 YTN 해직 기자들도 법적 구제를 받았다. 낙하산 사장 반대운동을 펼친 노종면 노조지부장 등 6명의 징계해고는 무효라는 법원의 판단이 나온 것이다.
판결의 핵심은 구본홍씨의 사장 취임을 반대하며 출근저지, 피켓시위, 항의농성 등을 벌인 YTN 노조의 활동에 언론의 독립과 정치적 중립이라는 공익성을 인정한 것이다.
법원은 "원고들의 행위는 대표이사가 특정 후보를 위해 활동했던 경력이 있어 YTN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공적이익을 도모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점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며 "원고들에게 근로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있는 사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다.
한편, 이에 앞서 지난 9월 법원은 노종면씨 등 노조간부 3명에게 업무방해 등의 혐의를 인정,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법원은 "출근저지투쟁이 방법에 있어 위법하므로 노조활동으로서 정당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본 것이다.
YTN 노조 지도부는 같은 행위를 놓고 같은 법원(서울중앙지법)에서 형사사건에선 유죄, 민사사건에서는 승소(징계무효)라는 상반된 판결을 받았다. 역시 두 사건 모두 항소심 진행중이다.
3. 미네르바는 풀려났지만 네티즌은 떨고 있다- 법원 "미네르바의 글, 허위 사실 아니다" 무죄 선고
미네르바가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네티즌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던 미네르바(본명 박대성)의 구속은 네티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검찰은 "미네르바가 정부의 환율정책을 방해하고 대외신인도를 저하시킬 목적으로 외환 보유고 고갈 등 허위 사실을 게시했다"며 전기통신법위반으로 기소했다.
검찰 관계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네르바의 글이 오른 뒤 불안감이 퍼지면서 정부가 상당한 금액의 외환을 시장에 풀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을 믿기도 어렵지만, 사실이더라도 한 나라 경제 정책이 네티즌 한 명에 좌지우지될만큼 취약하다면 그 책임은 정부에게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법원은 미네르바의 글이 "표현방식에서 과장이 있더라도 허위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법원은 인터넷은 누구나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고 미네르바의 글이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어 공익을 해칠 목적도 없었다고 보았다.
검찰은 미네르바의 글 280여 편 중 단 2편의 글을 문제삼았다. 이런 식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글들을 이 잡듯이 뒤진다면 하루에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법정에 서고도 남을 것이다. 법이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돼서는 곤란하다.
미네르바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네티즌들에게 미친 학습효과는 크다. 입 잘 못 놀리면, 아니 키보드 잘 못 누르면 잡혀갈 수도 있다는 …….
4. "고문 ․ 허위자백" 절규 외면했던 법원의 반성 - 군사정권 공안사건 재심서 무죄 판결 잇따라군사정권 시절 간첩사건, 국가보안법 사건 등 공안사건이 다시 사법부의 심판을 받고 있다. 고문과 조작을 통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수십년간 빨갱이, 간첩의 낙인을 찍힌 채 살아왔던 이들은 재심사건을 통해 뒤늦게 무죄를 받았다.
올해 이해찬 전 총리, 장영달 전 의원 등이 포함된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재심 사건을 비롯하여 아람회 사건,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에서 무죄판결이 쏟아졌다.
법원은 "공안기관의 불법구금과 고문, 협박에 따라 이루어진 자백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며 판결을 바로잡았지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한 사람들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들이 수십년간 받은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다.
아람회 사건의 재심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 사과의 글을 판결문에 담았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피고인들이 재판 과정에서 불법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조작·둔갑되어 허위 자백을 하였다고 절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법관들은 그 호소를 외면한 채 진실을 밝히고 지켜내지 못하였다."다시는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생사람을 잡는 시대가 오지 않으려면 법원의 반성이 빈말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절대 권력자나 힘을 가진 다수가 진실에 반하는 요구를 하더라도 법원은 진실을 말하는 힘없는 소수의 편이 되어 보호하여야 한다."(서울고법 2009.5.21. 선고 2000재노6 판결) 5. 검사가 기소권 남용했을 때 판사는?- "국회농성 사건, 특정당만 기소한 것은 차별" 공소기각 검사는 범죄자를 재판에 넘길 수도 있고 사정에 따라 봐줄 수도 있다. 기소권은 검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검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만일 죄를 지은 사람이 여럿 있는데 검사가 일부만 기소했다면 어떻게 될까. 기소된 사람 입장에선 억울하겠지만 판례는 "동일한 범죄행위로 처벌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유만으로는 검사가 공소권을 남용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검사가 자의적으로 공소권을 행사하여 소추재량권을 현저히 일탈했다고 보이는 경우"는 무효라는 것도 판례의 입장이다. 서울남부지법(마은혁 판사)은 미디어법 처리과정에서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을 점거한 혐의(공동퇴거불응)로 기소된 민주노동당 보좌관들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농성을 주도한 민주당은 아예 입건조차 되지 않은 점, 국회 사무총장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4일 농성 중 극히 일부분(2시간여)만을 기소한 점" 등을 들어 차별 의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결국 "동일 사건 피의자들을 차별 취급하고 그 차별이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 정당화될 수 없는 사유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행해지고 이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경우라면 공소제기는 무효"라는 것이 이 판결의 핵심이다.
이 판결은 검찰의 자의적 기소에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여당과 일부 언론은 판사의 사생활과 20년전 경력을 문제삼았다. 원래 좌파 기질이 있는 판사라서 진보정당에 유리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인 셈인데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6. "예금명의자가 통장의 주인"- 금융실명법에 따라 출연자 아닌 명의인에게 권리 인정 A씨는 아내 B씨와 함께 자신의 단골은행을 찾았다. 두 사람은 부인 B씨 명의로 예금통장을 만들었다. 이 통장은 A씨의 인감이 거래도장으로 찍혀 있었고, 비밀번호도 A씨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자도 A씨의 계좌로 입금되었다.
이 통장의 실제 주인은 A씨일까, B씨일까. 1심과 2심 법원은 A씨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겉으로는 B씨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A씨가 관리하던 통장이었으니 A씨와 금융기관 사이에 암묵적으로 이런 약정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3월 기존의 판례를 바꾸었다. 대법원은 통장의 비밀번호 관리, 자금출연 경위, 예금인출상황 등은 A씨와 B씨 간의 내부적 법률관계에 불과할 뿐 이를 예금계약 당사자를 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금융실명법에 따라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 예금계약을 체결하였다면 예금주로 기재된 B씨가 당사자"라고 판시했다. 만일 A씨가 당사자가 되려면 "예금계약서 이상의 명확한 증명력을 가진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예금명의자(예금주)가 예금 통장의 주인이다."
7. "삼보일배 시위는 표현의 자유 영역"- 유무죄 오간 삼보일배 사건, 사법부 7번째 재판중 약식명령 벌금형 → 1심 유죄(벌금형) → 2심 벌금형→ 대법원 파기환송(법리오해) → 2심 벌금형(일부 무죄) → 대법원 파기환송(무죄 취지) → 항소심 진행중.
재판부가 7번이나 바뀌면서 아직까지 진행중인 형사 사건이 있다. 4년 전에 있었던 삼보일배 시위를 놓고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2005년 5월 전국 건설운송노조 덤프연대는 대학로에서 옥외집회(행진)를 열었다. 그런데 이 집회에 울산 플랜트 노조원들이 참가하여 삼보일배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경찰은 애초에 신고한 내용(참가단체와 시위 방법 등)과 달라 미신고집회에 해당한다며 집시법,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덤프연대 간부 등 7명을 기소하였다.
1심과 2심은 유죄를 선고했으나 작년 7월 대법원은 "미신고 집회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사건을 다시 2심으로 내려보냈다. 두 번째 재판을 맡은 2심 법원은 "30분간 도로에서 삼보일배 행진을 한 것은 집회신고 범위를 벗어났다"며 일부 유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7월 또다른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예정된 행진이었고 △어떠한 폭력성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 △삼보일배 자체가 혐오감, 폭력성을 내포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시위 방법으로서 삼보일배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다시 사건은 항소심으로 내려갔다. 3번째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8. "혼인증명서는 아내 강간 자격증 아니다"- 부부 강간 최초 인정 ... "성전환자 성폭행도 강간""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여성도 미혼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이런 논리(1984년 뉴욕주 항소법원 판결)를 인정한 판결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왔다. 그동안 법원은 부부 강간을 인정하는 대신, 폭행 ․ 협박 등에 대해서만 우회적으로 처벌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작년 부산의 한 남성은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필리핀 국적)을 흉기로 위협하면서 성폭행한 혐의(특수강간)로 기소되었다. 법원(부산지법 형사5부. 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은 부부간 성적 교섭 의무는 당연히 인정되지만, 결혼을 했다고 해서 성적자기결정권을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부부강간은 면책된다는 과거의 그릇된 생각은 문명시대에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없는 구시대의 관념"이라며 "부부간 폭행과 협박 등을 처벌하면서 그보다 훨씬 죄질이 중한 죄(강간)를 처벌 못함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말로 그동안의 판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법원은 지난 1월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 판결이 1심 판결이라는 점(피고인은 안타깝게도 1심 판결 후 자살하였다)을 감안하면 아직은 특별하다.
한편, 대법원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성전환자(여성)도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성장기부터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보였고 성전환 수술 후 30여년 동안 여성으로서 살고 있는 피해자를 강간죄의 피해자가 된다고 판단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성의 결정에 생물학적 요소와 정신적․사회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9. "교과서라도 저자 허락 없이 수정 못해"- 역사교과서 수정 논란, 저작권자 손 들어주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른바 '좌편향 바로잡기' 바람이 불었다. 교육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뉴라이트 등 '보수단체'들은 일부 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좌편향'이라고 줄기차게 지적해왔고, 정부의 지시를 받은 출판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교과서를 수정, 배포하였다.
그러자 저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저자들은 저자의 동의없이 30곳이 수정된 교과서를 배포하지 말라며 소송을 냈다. 9월 법원은 저자들의 손을 들어줬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교과서라도 저작권자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판사가 교과서를 임의로 수정한 것은, 남이 자신의 저작권을 마음대로 고치지 못할 권리, 즉 동일성유지권을 침해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출판사쪽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 지시를 받아 불가피하게 수정한 것"이라고 맞섰지만 법원은 "교과서라고 하더라도 동일성 유지권의 행사가 제한된다고 해석하기 어렵다"고 맞섰다. 현재 항소심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