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구세군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불우이웃돕기 모금이 한창이다. 소비 심리가 위축된 올해에도 아이들의 푼돈 기부에서부터 어른들의 계좌 이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이들이 이웃을 돕고 있다. 하지만 개인 모금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최근 경제 위기의 높은 파고 속에서 실직과 가정해체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사회적 자원을 많이 갖고 있는 기업과 단체의 사회적 공헌 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최근 언론매체는 삼성, SK 등 대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동시에 언론사의 주도로 '사회책임경영대상' 시상식이나 '사회공헌지수'의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계도 가세하여 지난 11월 '2009 교회의 사회적 책임'(CSR; Church Social Responsibility)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명칭도 유사한 기업과 단체의 '사회책임경영'이나 '사회공헌활동'이 부쩍 강조되면서, 개념적으로는 뭔가 훈훈해지는 느낌을 갖는다. 마치 신을 의지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종교적 질서가 세상에 구현된 것 같다. 정말 영리를 추구하는 세속의 기업이나 단체들이 비영리적인 가치를 높이 받드는 종교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일까?
전통적인 세계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모든 인간 행동은 기독교적인 관점과 로마적인 관점, 양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것(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하찮은 것이며, 새로운 관심, 즉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 가치 체계를 각각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로 표현했으며, 이 두 도시는 심판의 날까지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통적인 기독교 사고의 중심에는 지위에 도덕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바탕을 이룬다. 예수는 종교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목수였다. 빌라도는 제국의 총독이었지만 죄인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개인의 자질을 반영한다는 주장은 기독교 세계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을 뿐이다. 기독교가 지배적인 유럽에서도 지위가 혈연에 따라 분배되었으며 세습되었다.
새로운 능력주의 세계관의 출현 세습주의를 기초로 한 지위 체계가 지배하던 상황은 18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능력이 없는 자들의 세습적 지위 획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 이데올로기는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교육이 확대되고, 시험에 의한 인재의 등용이 일반화해 갔다. 이뿐만 아니라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세습주의 사회에서 지위는 자신의 혈연적 배경만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제 부가 품성의 온당한 지표로 여겨질 수 있게 되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 특히 미국에서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부(富)'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미국의 개신교파들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토머스 P. 헌트 목사가 1836년에 낸 베스트셀러 <부에 대하여 : 부자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는 사실은 성경이 증명한다>에도 반영되어 있다. 존 D. 록펠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능력주의 세계관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세속 도시'와 '신의 도시'의 구별이 의미를 잃는다. 이제 '세속 도시'에서의 성공과 부는 도덕적이면서 경건한 인간에게만 찾아온다, 아주 가끔 시편 저자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가 번창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 그것은 드문 일이 된다.
경제적 능력주의와 빈자에 대한 자비심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가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서 빈자들은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다. 억척스럽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눈에는 빈자들이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능력주의 세계관에 과학적인 정당성을 제공한 것이 이른바 19세기 <사회적 진화론>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적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정의롭게 이루어진다.
이에 더 나아가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짧은 수명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 통계학>에서 생물학적 원리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미국의 대중 설교가 헨리 W. 비처 목사는 <진화와 종교>에서 스펜서의 교의가 '신의 도시'에서도 관철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그는 사회적 진화론이 신의 의지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비'에 대한 스펜서의 견해는 미국의 재계와 교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기부'로 유명한 미국의 거부 앤드류 카네기도 실제로는 사회복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근면한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고 말하였다.
로마인이 '요란한 선행'을 하는 이유
그런데 이러한 능력주의 세계관을 가진 카네기는 왜 거액의 기부를 했을까? 왜 록펠러는 젊은 '프레더릭 게이츠' 목사의 '자선' 권유를 받아들였을까?
18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품으로서의 노동은 원료와 기계와 같은 투입 요소의 하나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곤혹스럽게도 '노동'은 원료나 기계와는 다른 특질이 하나 있다. 즉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거나,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세계적인 거부 록펠러도 노동자와의 첨예한 갈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1914년 콜로라도 주 라드로 광산에서 발생한 '라드로 학살'(Ludlow Massacre)은 록펠러 일가의 사회적 지위를 근본적으로 위험에 빠뜨렸다.
광산촌의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불태워 죽인 일로 사회적인 공분을 야기한 록펠러는 위기 탈출을 위해 홍보 전문가를 동원해 '잔혹한 자본가'에서 '자선사업가'로 이미지 개선을 시도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PR(Public Relation) 산업의 효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스크루지 '록펠러 일가'는 카네기 수준을 뛰어넘는 자선사업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록펠러는 남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기 시작한 뒤로 오히려 재산이 점점 불어나게 된다. 놀랍게도 자연 질서에 반한다고 여겨졌던 '자선'이 록펠러 일가와 산하 기업들에게 새로운 차별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20세기에 출현한 '대량 공급 경제체제'에서 '적선'과 '기부'는 경제적으로도 이로운 '자선사업(charitable work)'이 되었다.
진화 심리학은 '적선'이나 '기부'와 같은 기업의 '요란한 선행'(Blatant Benevolence)을 상대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알리는 '신호'(Signal)로 이해한다. 신호가 거듭되면 상대는 일정한 이미지를 창출하게 된다.
록펠러는 '적선'과 '기부'를 통해 자신이 '영리'만을 추구하는 경제 동물이 아니라는 신호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공급과잉의 대량생산 시대에 경쟁 상대와는 다른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과도 부합하기 때문에 부가적으로 종교적인 축복도 받을 수 있었다.
성장의 정체와 사회적 책임경영 이처럼 사회적 진화론에 기초한 적응주의에 따르면 기업의 요란한 선행은 '공급과잉의 경제체제'에서 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선택에 불과하게 된다. 결코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승리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폭발적인 성장과 집중을 거듭한 우리나라 교회들은 90년대에 들어와 성장의 정체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의 정체가 우려되는 것은 신자의 감소가 사회적 신뢰도 저하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성장 정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이나 '윤리경영'이 강조되는 바탕에는 재벌로 대표되는 대기업들의 약탈적인 자본 축적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불신이 깔려 있다.
능력주의 세계관과 경쟁적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규모'의 축소는 패배를 뜻한다. 성장의 정체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닮은꼴인 기업과 교회는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록펠러처럼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세속 도시와 신의 도시의 지배 원리와 생존 전략이 너무 흡사해졌다. 어쩌면 생존을 위한 경제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두 도시의 지배 원리가 화학적으로 융합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업과 교회 등의 사회적 책임경영이 '윤리경영'으로 포장되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니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김대규 기자는 서울디지털대학교 법학전공 조교수입니다.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게재되었다. 또한 이 글은 '앙드레 드 보통'의 <불안>과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 J. K. 갤브레이스의 <경제학의 역사>를 주로 참조하였다. 이 밖에 '라드로 학살'(Ludlow Massacre)에 관해서는 < WiKipidia >의 설명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