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 때쯤이면 시골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김장김치가 택배로 부쳐온다. 해마다 농사를 힘에 부치도록 많이 짓는 부모님은 겨울에 김장할 무, 배추는 또 적게 심을 리 만무하고 한 번 김장을 담그기 시작하면 김치공장이라도 차린 것처럼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많이 하신다.
올 겨울 역시 싱싱하고 푸릇푸릇한 좋은 배추가 밭 가득 잘 되었다. 며칠 전 부모님은 김장을 했다. 나는 해마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김장김치를 먹으며 겨울을 나고 봄, 여름, 가을, 또 겨울 김장을 하는 계절이 돌아오기까지 먹는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김장을 하던 날, 서울언니와 나, 동생들이 함께 시골로 내려가서 김장을 도우려고 계획했지만 같은 시간에 모이기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첫 김장은(두 번이나 했다) 동생들 둘만 부모님 김장하는 것을 도왔다. 차 타고 배 타고 시골로 내려가 동생들은 김장을 도왔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김장을 하는 것을 엄마 옆에서 거들면서 두 동생은 김장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투덜거렸다고 한다.
엄마가 몸도 아끼지 않고 힘에 부치도록 많은 김장을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투덜투덜, 멀리 서울 있는 큰 언니도 작은 언니도 오지 않고 지네들만 힘들게 한다고 투덜투덜, 해도 해도 일이 줄어들지 않아 투덜투덜, 에너지 넘치는 엄마의 김장 하는 것에 젊은 것들이 힘들다고 투덜투덜, 김장이든 뭐든 일을 너무 많이 벌리는 엄마를 눈치하며 이래저래 투덜거려 엄마의 귀를 송신케 했다는 후문이다.
김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끝날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투덜거리자 듣다 듣다 귀가 송신해 함께 돕던 외숙모가 한 마디 했다나 어쨌다나.
"일절만 해라이~언제까지 그라 끼고!"엄마는 옆에서 허허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침 내가 내려갔을 때는 엄청난 분량의 김장을 하고 난 뒤였고, 많이 해서 많이 퍼 줘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 그래도 모자란다 싶어서 다시 배추 소금 간을 해 놓고 있을 때였다. 첫 김장 한 것으로 부산 동생은 일하는 동안 내내 투덜거리더니 큰 김치냉장고 한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김장김치를 차에 차곡차곡 실어 갔고, 울산에 있는 남동생네도 뒤에 내려와서 김치냉장고 가득 채울 분량의 김치를 가지고 간 뒤였다.
토요일 오후에 양산에서 출발했기에 고향마을에 도착하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었다. 우리 부모님집이 있는 골목 입구 앞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오자 코끝에 와 닿는 군고구마 냄새, 분명 우리 집의 것이 분명했다. 이 익숙한 냄새, 추억의 냄새는 우리의 것이었다. 어둠에 물든 바다를 잠깐 일별하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집 앞에 도착하자 현관 맞은편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너울너울 다 타고 난 뒤 발간 숯불이 밝았다. 이 아궁이에서 엄마는 간장을 끓이고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젓국을 끓이고 한다. 분명 여기다 고구마를 구운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왔음을 소리 내어 알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역시, 아궁이에서 구워낸 군고구마가 담긴 접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과 동생, 조카들 모두 나와 얼싸안고 한바탕 인사하느라 마루가 들썩거렸다. 와우~군고구마! 하며 접시를 끌어안고 추억의 군고구마 맛을 기대하며 먹어보았다. 조금 많이 타서 껍질이 숯검댕이처럼 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동생 부부는 마지막 배를 예약해 두었었지만 우리가 온다고 해서 얼굴 보고 가려고 예약을 취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부부랑 함께 이야기하다가 그들은 밤늦게 육로로 갔다. 남동생이 가고 난 뒤에 엄마와 나, 동생은 함께 현관 밖으로 나갔다. 큰 고무 통 세 개에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은 것을 씻기 위해 수돗물을 켜고 장갑을 끼고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마침 바람도 없고 포근한 겨울밤이었다. 별마저 초롱초롱, 쏟아져 내릴 듯 빛나는 별밤이어서 좋았다.
늦은 밤, 우리 세 사람은 여러 개의 대야를 줄줄이 잇대어 놓고 배추를 씻어 차례로 건져 올렸고, 물이 잘 빠지도록 차곡차곡 대고 발에다가 쌓았다. 고요한 밤에 배추 씻는 소리와 우리들 소곤거리는 소리만 밤을 깨웠다.
제법 많은 양의 배추였지만 셋이서 함께 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즐겁게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고요한 겨울밤, 별빛 아래서 김장김치를 씻는 우리들은 피곤한 것도 잊고 즐거웠다. 별밤의 체조(?)였다. 이튿날은 낮에 밭에 가서 시금치랑 생배추랑 뽑아 캐서 왔다. 오후에 또 양산으로 출발해야 했다.
낮에라도 건져놓은 배추를 양념해서 김장을 끝낼 수 있으면 김장을 마무리 하고 돌아가겠건만, 물이 덜 빠져서 당장 할 수도 없었다. 일을 채 마무리 하지 못하고 가게 돼서 엄마가 힘들 것 같았다. 저녁 마지막 배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배를 예약했지만 사람들이 많아 대기자 명단에 올라갔다. 하지만 결국 대기자도 여러 사람이 되서 우리 차례까지 오지 않아 여객선 터미널까지 갔다가 도로 돌아왔다.
날은 어두워졌고 몇 시간 동안 어둔 길을 따라 차로 갈 것을 생각하니 힘들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다시 가니 새로 온 것처럼 다들 반가워했다. 이참에 내일 하려고 미뤄두었던 배추 김장을 밤에 다 해버리기로 했다. 차를 마시고 앉아 이야기 하며 놀다가 이제 슬슬 김장 양념을 하기 시작했다.
간 해놓은 배추는 어느새 물이 잘 빠져 있었고 엄청난 양의 양념장으로 배추 양념을 했다.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안 하던 일을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서 계속하다 보니 목과 어깨,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쑤셨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깨야!" 동생과 내가 번갈아가면서 아프다고 하니 엄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젊은 것들이 꼴랑, 그것 좀 한다고 아파 죽겠다 하니 무슨 일 해묵고 살겄노!"하며 웃었다. "그래 말이에요!"하면서도 또 조금 일하다 말고 일어나 허리 펴고 고개 돌리고 법석을 떨었다. 그래도 셋이서 이야기도 하면서 따뜻한 마루에 앉아서 양념 간을 하니 몸은 쑤시고 아팠지만 재미있었다. 요즘은 택배도 아이스박스 아니면 가지러 오지를 않는단다.
엄마는 양념한 김치를 아이스박스 안에 차곡차곡 담아서 아버지한테 건네주면, 아버지는 아이스박스 테두리를 유리 테이프로 붙이고 끈으로 묶고 하면서 옆에서 즐거이 거들었다. 10개도 더 되는 아이스박스에 담는 김치는 서울 언니네로 갈 것들이었다. "뭘 그리 많이 보내줘요. 6, 7개 정도 해도 많겠건만"하고 말하자 아버지는 하는 데까지 담아보라고 했다.
큰 대빵은 대빵 언닌가 보다. 언니는 이런 수고를 얼마나 알까. 아무래도 아버진 언니한테 전화 왔을 때, 형부의 말 한마디에 뿅 가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형부가 아버지한테 보내드리려고 좋아하시는 과자랑 몇 가지 사놓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과자에 뿅 가신 것이 분명했다. 감동 먹어서 더 보내고 싶은 것이었다.
"아버진 형부가 보낸다는 과자만 보이나 봐요, 우리가 한 건 안 보이나봐요~!"하고 짐짓 질투라도 하듯 말했더니 아버진 정색을 하고 '아니다'하고 말씀하셨다. 행여라도 차별대우 한다고 생각할까봐 농담으로 한 말도 정색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또 옆에서 거들었다. "니들이 부모 마음을 어찌 다 알겠노!"했다. 그냥 해 본 소린데...
그 많던 배추도 차츰 굴었고 드디어 김장을 끝냈다. 저녁 8시께 시작했던 김장은 새벽 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뿌듯했다. 비록 얘기하고 배추 씻고 김장하면서 이틀 밤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엄마를 도와서 김장을 다 끝낼 수 있어서 마음이 가뿐했다. 월동 준비 끝이다.
엄마는 이맘 때면 간장, 된장, 고추장, 젓국 등을 담그고 마지막으로 김장을 한다. 김장을 다 끝내고 나면 월동 준비는 완료, 겨울 동안은 내내 몸이 좀 쉼을 얻는다. 엄마를 도와서 김장을 다 끝내고 나니 내 마음도 가벼웠다. 새벽 1시가 넘어서 겨우 잠이 설핏 들었다가 새벽 4시에 깨어 일어나 양산으로 출발했다.
몸은 배추 간이라도 한 것처럼 무겁고 피곤했다. 새벽을 뚫고 집에 도착하니 오전 7시, 그 많은 짐이 다 차 안에 들어갔다니, 차에 있던 짐을 집에 올려놓고 보니 많기도 했다. 햅쌀 한 포대, 김장김치 몇 박스, 무 한 박스, 고추장, 된장, 간장, 생 배추, 시금치 등 한 살림 가득했다. 남편은 다 옮겨놓고 하는 말, "만선의 기쁨이~"하며 좋아했다.
덕분에 이날 온종일 몸이 피곤하고 몸살기까지 있어 완전히 뻗어 누워 있어야 했다. 엄마가 "내년부턴 진짜 안 할거다"라고 말하자, 김장을 도우러 왔던 외숙모는 해마다 속아왔기에 "경화네(언니 이름) 니가 안 해? 그래 안 하나 한번 보자!"고 했다던데, 정말 내년엔 하더라도 일을 좀 줄였으면 좋겠다. 김장 김치 하는 일을 도우고 와서, 그리고 또 만선의 기쁨을 안고 와서 흐뭇한 월동 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