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지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일이 있었다. 아침에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가 냉장고에 붙어 있는 짧은 글을 읽었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선한 인간으로 살기 위한 일상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인상적인 글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일 수밖에 없다. 저 불온한(?) 글을 쓴 이는 누구일까? 정체가 궁금했다.
"아이들 학교 보내지 마세요, 낙오자가 선구자입니다"약 1주일이 지난 16일 저녁,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그의 정체를 확인했다.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바로 그였다. 저 글은 김 교수가 1999년에 펴낸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에 나온다.
이날 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공동 기획한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8번째 특강자로 나섰다. 특강 주제는 '학벌사회의 용기 있는 낙오자들, 미래를 열다'였으니, 역시 불온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벌이 부와 명예를 결정하고, 부모의 학벌이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이 땅에서 "서울대, 연·고대 졸업생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따질 줄 알고, 학부모들에게 "아이들 학교 보내지 마세요"라고 서슴없이 제안하는 김 교수에게 온건한 모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오랫동안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운동을 벌여온 김 교수의 강연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아이들 학교 보내지 마세요. 낙오자가 선구자입니다!"
김 교수가 특강을 들으러 온 70여 명의 시민들을 상대로 선동을 한 건 아니다. 그는 이미 바로 전날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전 국민에게 명쾌하게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자행되는 온갖 불의를 참는 인내심은 비굴함일 뿐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학교를 떠나, 낙오를 두려워 말고 자기의 길을 가라. 병든 세상에서 낙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선구자가 되는 법이다."새로운 세상을 여는 선구자가 되려면 우선 학교부터 떠나라? 한국 사회는 학교를 떠나는 학생에게 늘 '양아치', '문제아' 등의 굴레를 씌워왔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런 굳건한 상식에 도전하는 김 교수의 발언은 뚜렷하고 선명하다. 에둘러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냥 바로 정곡을 찔러 버린다.
김 교수는 "교육의 이념은 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키워주는 것이지만,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자유와 주체적인 자기형성을 억압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상처 받느니 집에서 놀게 하는 게 낫다"며 "학교에 다녀도 학원 다녀야 하는데, 차리라 집에서 가르치거나 학원을 선택해서 스스로 공부하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한국 교육은 자유의지와 자기형성 기회 무너뜨려"그는 "정원이 3000명에 불과한 어느 한 대학을 두고 50만 명이 경쟁하는 곳이 과연 정상인가, 여러 가지가 망가지고 나빠지는 건 당연하다"며 "시험이 목적이 되어 버린 학교와 사회는 대답하는 데 길들여진 인간만을 만들어 낸다"고 꼬집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질문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서로 대화할 줄 모른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웃기게도,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눈치 하나는 진짜 빠르다. 말을 안 하면 눈치로 일사천리로 소통이 되고, 말을 하면 소통이 안 된다."수강생들은 다소 허탈한 웃음으로 "질문은 못하지만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 이 사회의 현실을 인정했다. 김 교수는 말로만 이렇게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실제로 전남대 철학과 신입생을 뽑을 때도 자발적으로 학교를 떠난 학생들을 따로 뽑는다. 그리고 그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에 감탄한다.
김 교수는 "신입생 면접을 해보면 검정고시 출신들이 제일 낫고, 그 다음이 대안학교 학생들이다"며 "일반고 학생들 면접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일단 대답이 다 똑같고 기회주의적이다"고 말했다.
또 김 교수는 서울대학교를 없애는 대학평준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모든 국립대학이 추첨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교수도 순환보직으로 하자는 것이다. 눈만 뜨면 '글로벌 리더 육성'을 말하고 "인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말을 보배처럼 받드는 한국 사회에서 감히 서울대를 없애자니.
"서울대 없애면 우리가 망한다고? 그건 특권계급이 우리에게 주입한 신화에 불과하다. 예전에 박정희가 죽으면 세상 망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망했나? 절대 안 망한다. 그리고 서울대가 우리에게 해준 거 없다. 서울대 없애면, 유학 갈 사람은 갈 것이다. 미국 좋아하는 사람 많으니까, 다 가라고 하자. 그리고 못난 우리들끼리 살겠다고 말하자. 한국은 상위 10%를 위해 나머지가 희생하는 사회다. 이제 이걸 바꿔야 한다.""운전면허 필기 만점자가 운전 잘하나? 서울대 없애도 안 망한다"김 교수는 "중고교 시절에 시험을 잘 쳤다고 한 사회의 부를 10배, 100배 몰아줘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이런 한마디로 '시험 잘 보는 아이 = 인재'의 등식을 깨버렸다.
"아니, 운전면허 필기시험 잘 본 사람이 베스트 드라이버 됩니까?"김 교수는 "한국 사회가 지금과 같은 학벌 사회를 견디지 못하는 때가 이제 10년 안에 찾아온다"고 단언했다. 또 "용기를 갖고 학교를 나와 과감하게 낙오자가 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늘 책을 읽을 줄 알고, 혼자 있어도 예술의 미적 아우라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키우자"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분노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하자"고 당부했다. 강의를 마칠 즈음 김 교수는 철학자로서 모든 이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유일하게 지키고 가져야 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도덕적 열등감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보면서도 부끄러웠다는 윤동주의 시처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한마디로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내내 유쾌하게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실에서는 웃음이 자주 터졌다. 김 교수는 자신의 말대로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