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밭은 언제나 스트레스와 번뇌를 거뜬히 털어내준다. 눈 덮인 겨울이나 따스한 햇볕 내리쬐는 봄날이면 더 좋겠지만, 굳이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차나무 사이를 산책하고 따끈한 녹차 한 잔 마시고 나면 몸은 어느덧 훈훈해지고 마음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로 차밭이 언제나 몇 손가락에 꼽히는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차밭이 있는 보성으로 가본다.
차밭은 사계절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하여 연인들 사이에선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려고 부러 찾기도 한다. 이성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에 층층을 이룬 차밭만큼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밭이 겨울에도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눈 쌓인 차밭은 또 동화 속 마법의 세계 같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이 차밭에 초대형 트리가 설치됐다. 지난 1999년 12월 이른바 밀레니엄 트리로 첫 선을 보인 그 트리다. 이 트리가 지난 11일 불을 밝혔다. 차밭 트리는 봇재다원과 다향각 전망대를 중심으로 설치돼 있다. 봇재다원과 다향각은 보성읍에서 율포 방면으로 가는 길에 있다.
이 트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트리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높이가 무려 120m, 폭이 160m나 된다. 이렇게 큰 트리에 여러 가지 색상과 디자인의 조명이 켜졌다. 여기에 들어간 전구만도 150여만 개나 된다고 한다.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다.
차밭 골골에는 또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터널도 만들어졌다. 흡사 눈꽃이 내리는 것 같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봇재에서 다향각에 이르는 도로변에도 오색 불빛이 반짝인다. 동화 속 마법의 세계가 따로 없다.
차밭 트리를 보고 은하수터널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나누는 일상의 대화는 영화 주인공의 대사가 된다. 연인들끼리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가족간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랑의 포토존도 설치돼 있다. 새해 소망카드도 적어서 걸 수 있는 코너도 있어 낭만적이다. 연인이나 가족끼리 가면 더 좋다. 겨울날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기며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차밭 트리는 새해 1월 말까지 날마다 불을 밝힌다. 점등 시간은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차밭을 걸으며 대형 트리를 보고, 따끈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녹이면 겨울 차밭여행의 묘미가 더 짙어질 것이다.
트리를 보기 전엔 부근의 차밭을 돌아봐도 좋다. 가까운 율포해변을 거닐어도 좋겠다. 해수녹차탕에서 겨울바다를 전망하며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아예 벌교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벌교는 분단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다.
<태백산맥>은 대작이다. 모두 10권으로 발간돼 70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태백산맥문학관도 들어서 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 문학관은 소설의 첫 장면으로 정화섭이 무당 소화를 만나기 위해 길을 가던 그 지점, 제석산 끝자락에 세워져 있다. 소설 속 현부자네 집 바로 앞이다.
문학관은 2층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선 <태백산맥>의 탄생 과정을 소상히 살펴볼 수 있다. 작가가 꼼꼼하게 적어놓은 취재 수첩과 메모, 그리고 역사적 사실 확인을 위해 복사해 둔 신문자료 등도 있다. 작가의 구성노트와 집필과정 누계표 등도 볼 수 있다.
작가가 만년필로 원고지에다 쓴 육필원고도 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그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1만6500장이나 된다. 이 원고뭉치를 쌓아놨는데 높이가 어른 키만큼 된다. 이걸 포함해서 문학관 전시자료가 모두 144건, 623점에 이른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작품전시관인 셈이다.
벌교가 소설의 실제 무대인 만큼 소설 속 배경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문학관 바로 옆에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현부자네 집이 있다. 소설 1권이 시작되는 장소로, 조직의 밀명을 받은 술도가의 아들 정하섭이 무당 소화를 찾아왔다가 숨어 지내던 곳이다. 둘의 애틋하고 가슴 시린 운명 같은 사랑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밀물 때 올라온 바닷물이 피바다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소화다리(부용교)와 무지개형의 돌다리인 횡갯다리(홍교)도 있다. 이 두 다리는 여순사건 당시 좌익과 우익이 서로를 즉결 처형을 단행했던 곳이다.
소설에서 우익인 '쌍칼'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준 게 철다리다. 해방 전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이후 장터거리의 오야붕 쟁탈전에서 기차가 다가올 때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를 했던 그 철길이다. 철다리는 벌교역에서 현부자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밖에도 고택 김범우의 집과 중도방죽, 남도여관, 회정리교회, 벌교역, 금융조합 등도 있다. 작품의 구절을 떠올리며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범우, 염상진, 염상구, 서민영, 외서댁, 그리고 소화의 꿈과 절망, 사랑과 투쟁, 죽음 등 가파른 인생사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소설 속 분위기도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그것을 읽을 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난다.
주암호변에 있는 대원사도 가볼 만하다. 절로 들어가는 길은 봄에 벚꽃 흐드러지게 피던 길이다. 그 절이 특이하다. 그곳에 놓인 불상이나 석상, 심지어 풍경과 소리까지도 한국 것이 아닌 것 같다. 천편일률적인 사찰여행이 아닌, 이색적인 사찰 분위기를 선사한다. 티베트의 문화와 불교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
대원사에서 가까운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한 서재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여기에는 서울에 있는 독립문의 실측모형과 서재필의 사당, 생가가 있다.
벌교는 꼬막의 주산지다. 게다가 지금이 꼬막의 제철이다. 꼬막음식 맛보는 것도 보성여행을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통꼬막을 비롯 꼬막전, 꼬막회, 꼬막무침, 꼬막탕이 나오는 꼬막정식이나 꼬막회비빔밥 맛이 그만이다. 비릿하면서도 쫄깃한 꼬막만으로도 보성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녹차의 고장답게 녹차 먹인 돼지고기와 녹차를 가미한 다양한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야들야들하고 쫄깃쫄깃한 고기 맛이 일품인 녹돈은 보성읍과 율포해수욕장 부근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다. 도라지, 미나리, 김에 찻잎과 초고추장에 버무린 꼬막을 함께 넣어 비벼먹는 녹차꼬막회비빔밥과 녹차떡국, 녹차수제비 등도 별미다. 녹차음식은 보성다원과 보성읍내에서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