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장면 엄청 맛있어요. 매일 매일 먹고 싶어요."
한 해의 끝자락 한파 속에서 지난 여름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후끈한 열기가 엄습해 오던 삼복 더위에 곱빼기 자장면을 먹고도 더 먹으려고 길게 줄서던 소녀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대성장 고영호(48) 사장이 "이렇게 저어서 이렇게......"하며 능숙한 솜씨로 봉사자들에게 면 삶는 것을 설명하던 기억은 싸늘한 한파도 거뜬히 녹일 듯 훈훈하다.
있는 그대로 봐 줬으면......
봉사자들이 귀띔하는 서울소년원, 안양소년원, 서울심사분류원, 안양교도소, 베데스다, 에덴의집, 느티나무, 사랑과 평화의집, 아름다운 시설에 7년째 묵묵히 자장면을 후원해 온 이야기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다.
미담을 따라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은 물론, 아예 자리까지 피해 버린다. 조그만 일을 '침소봉대'해 잦은 언론 플레이로 상 받는 사람을 보아온 터라, 수차례 집요하게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이다.
할 수 없이 지난해 안양 시민대상 (봉사부문) 수상자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박동진 회장을 앞세워 무작정 그가 운영하는 안양5동 대성장을 찾았다.
박 회장은 "여러 언론매체에서 취재 나왔다가 말도 못 꺼내고 돌아갔다"며 필자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른다. 고 사장은 마지못해 "세상이 있는 그대로 봐 줬으면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KBS <카네이션기행>에 방영된 후 "얼마나 돈을 벌었기에...... 돈이 많나 보다. 우리도 그렇게 해 달라......"는 등등 곤욕을 치렀다고. "이렇게 봉사하기까지 꼭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춥고 배고팠거나 가슴시린 사연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인다.
자장면의 대부 고영호씨
박 회장이 서울소년원생을 대상으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조사한 결과 자장면이 압도적이었다. 중국집 여러 곳을 물색했지만 한 그릇에 2500원을 요구하거나 '도리도리'로 일관할 무렵, 구세주처럼 흔쾌히 수락한 것은 고 사장이었다고.
고 사장은 "자장면 좀 싸게 해 달라기에 뭐 거창하게 생각한 것도 아니고, 딱 한 번만 하려고 했지요. 박 회장에게 코 끼어서 년 간 4천여 그릇을 후원하지만, 시설에서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솔직히 기분은 좋아요"한다.
하지만 곱빼기 300그릇 준비과정은 만만치 않다. 전날부터 양파 8망, 밀가루(20kg) 6포대 반죽까지 종업원들과 꼬박 5시간을 동동 거려야 한다. 삼복더위에 냉방시설도 없는 좁은 주방에서 자장 볶고 반죽하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고. 주방장인 동생은 운동 하다가 최근 인대가 끊어진 상태다.
턱없이 일손이 부족한 가운데 11월에도 안양소년원을 비롯해 4개 시설에 자장면 봉사를 거뜬히 해냈다. 노인이나 장애인시설은 직접 먹여 주며 훈훈한 인정도 느끼지만, 만남이 차단된 철창 안 교도소에서는 면 뽑아 삶다보면 수혜자들을 보고 느낄 틈조차 없다.
넘지 못한 불신의 벽
그는 전남 여수에서 21세에 상경, 중국집에서 형의 일을 도우며 자장면과 함께 잔뼈가 굵었다. "안양에서 자영업을 한 지 20년째, 처음에는 마진도 좋았는데 요즘은 인건비와 재료비 빼면 웬만큼 팔아서는......" 말 끝을 흐린다.
그러기에 명절 때 사흘 쉬는 날 빼고는 24시간 영업을 하며 늘 요리를 연구하고 개발한다. 매형이 청송에서 농사 지은 검은콩과 도토리 가루를 배합하여 자장면을 뽑았다.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일부 고객들이 "자장면 색이 왜 이러냐. 혹시 중국산 아니냐"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도토리와 콩 자루를 확인해 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밀가루 외에는 못 믿겠다"는 불신의 벽은 어쩔 수 없었다고.
호계2동에서 대성장을 운영하는 부인 최창순(46)씨 역시, 남편의 자장면 봉사를 적극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다. 대성장 부부의 넉넉하고 훈훈한 곱빼기 사랑이, 한해의 끝자락 엄동설한 한파까지 훈훈히 녹일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