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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품은 장항습지 자유로 변 1차 철책 안에 설치된 장항습지 안내표지판
▲ 생명을 품은 장항습지 자유로 변 1차 철책 안에 설치된 장항습지 안내표지판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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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를 흠모했습니다. 진실하고 치열한 궤적도 없이 책상머리에 앉아 쌓은 허름한 지식의 언어를 치밀하게 꿰맞추고 조합하여 만든 그런 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에는 어려운 말, 고급스러운 표현, 멋스런 치장과 지식귀족의 가식이 엿보이질 않았고, 절절히 우러나는 가슴 속 뜨거운 피의 언어가 녹아있었습니다. 슬픔과 분노를 아름다운 인간사랑의 투쟁으로 승화시키는 뭉클한 선동의 언어, 희망의 언어가 진하게 배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차가운 시베리아의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12월 하순, 자유로 변 장항습지의 철책 통문을 들어서면서 문득 그의 시 한 편이 운명처럼 떠올라 더듬어 보게 되었습니다.

사   랑

박노해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사랑은 갈라섬,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노동, 지루하고 괴로운 노동자의 길
사랑은 자기를 해체하는 것,
우리가 되어 역사 속에 녹아들어 소생하는 것
사랑은 잔인한 것, 냉혹한 결단
사랑은 투쟁, 무자비한 투쟁
사랑은 회오리,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일어서
폭풍치고 번개치며 포효하며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아란 하늘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 위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 하나이 되어
춤추며 노래하는 눈부신 새날의
위대한 잉태...

분단의 비애와 동족간의 적대적 긴장이 여전히 녹슨 철책으로 가로막고 있는 장항습지 통문을 들어서며 왜 하필 박노해의 '사랑'이란 시가 떠올랐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또렷이 기억에 떠오르는 아련한 한 토막 구절이 입가에서, 아니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장항습지는 생태계의 보고이자 생명평화지대

지난 20일 고양시에 걷기 좋은 작은 길, 착한 길을 열기 위한 걷기모임 <고양올레> 회원들과 장항습지 생태탐방이 있었습니다. 칼바람 예리하게 뺨을 때리던 그날은 몹시 추웠지만, 마치 솜사탕을 머금은 것 같은 물억새와 갈대의 바다가 파도처럼 휘몰아 물결치는 습지의 들녘을 걸었습니다.

생명을 품은 아름다운 평화의 터전 장항습지 장항습지에 물결처럼 파도치는 아름다운 물 억새와 갈대
▲ 생명을 품은 아름다운 평화의 터전 장항습지 장항습지에 물결처럼 파도치는 아름다운 물 억새와 갈대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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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장항습지에서 만난 고라니 - 장항습지는 국내에서 단위면적당 고라니 개체수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한 곳이다.
▲ 고라니 장항습지에서 만난 고라니 - 장항습지는 국내에서 단위면적당 고라니 개체수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한 곳이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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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고양시에 역사의 우연과 아이러니로 생태계 보고이자 천혜의 생명평화지대로서 '장항습지'가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었던 소중한 걸음이었습니다. 눈으로, 걸음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보람찬 걷기여행이자 감동의 생태탐방을 했습니다.

통문을 통과하여 습지 들녘으로 향하는 길을 스쳐 지났습니다. 때마침 습지 입구를 지키는 초병처럼 장끼와 까투리는 깜짝 놀라 하늘로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길가의 가녀린 나무 틈에 동그랗게 집을 마련한 '붉은 머리 오목눈이'의 아담한 보금자리도 보았습니다. 지척으로 가까운 무논에 옹기종기 모여 볍씨 모이를 주워 먹는 오리 떼와 큰 기러기, 천연기념물 재두루미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평화로운 식사와 휴식을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의 순결한 야생성은 우리들의 주의 깊지 못한 무의식적 환호와 반가움에 곧바로 예민한 놀람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평화로운 식사와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날카로운 바람을 헤치고서 마른 갈대 사이로 줄지어 나아갈 무렵, 갈대숲에서 버드나무 군락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뛰어오르며 예쁜 엉덩이를 살짝 빗겨 보여주고 달아나던 순진한 고라니도 보았습니다. 장항습지와 한강 사이 모래톱에 무리지어 노니는 수 백, 수 천 마리 오리 떼의 비상과 군무는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한 장면처럼 감동적으로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오리 떼의 비상과 군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에 맞춰 바람처럼 구름처럼 하늘을 나는 오리 떼
▲ 수많은 오리 떼의 비상과 군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에 맞춰 바람처럼 구름처럼 하늘을 나는 오리 떼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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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재두루미 장항습지에 찾아온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무리가 먹이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장항습지에 찾아온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무리가 먹이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 박평수(고양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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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뿐사뿐 걸으며 다소곳이 먹이를 주워 먹는 재두루미 몇 쌍의 세련되고 단아한 몸짓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느껴지는 그들의 잔잔하고 깊은 사랑을 소리 죽여 감상하며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장항습지는 생명의 가치와 통합의 가치를 품고 있는 우리의 자산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섞이는 기수역 장항습지는 동식물의 풍부한 먹이와 생물다양성이 존재하는 귀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장항습지는 단위면적당 고라니 개체수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자, 국내 최대라고 알려진 버드나무 군락이 넓게 펼쳐진 자연습지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고양시와 인근 김포시, 서울에까지 맑고 신선한 산소를 넉넉히 공급해주는 훌륭한 산소탱크이기도 하니 우리에게 더 이상 말 할 나위 없는 축복의 대지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무더운 여름에는 뜨거운 열을 흡수하여 고양시 기온을 2도 가량 낮춰주는 역할을 하는 초원이자 숲이라고 합니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습지 들녘에 서서 장항습지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항습지는 위치로 봐서도 북으로 가는 '자유로'와 곧바로 인접해 있으며,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 군사분계선, 임진각, 개성공단 출입국 사무소 등이 지척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교하)이고, 두 강이 가진 남과 북의 역사적 상징성을 포괄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통합과 교류의 상징성을 크게 보듬어 남북 분단 해소의 최대 명제인 평화를 이끌어내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평화를 이끌어내어 남북한 사회 통합과 평화 통일을 일구기 위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기꺼이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차가운 땅에 볍씨 한 줌 줄 수 있다면... 습지의 들녘에 철새들의 모이인 볍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 우리의 마음이 이 차가운 땅에 볍씨 한 줌 줄 수 있다면... 습지의 들녘에 철새들의 모이인 볍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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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습지는 개발논리에 의한 단순한 경제 가치를 훨씬 초월한 그 이상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와 통합의 가치를 품은 우리의 자산이자 터전입니다. 그에 대한 근거와 까닭을 몸으로, 걸음을 통하여 비로소 깨닫고 체득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치'의 기준과 크기와 경중에 대해서도 가만히 성찰해 봅니다. 과연 그 어떤 무엇이 생명의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로 존재할 수 있는지...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념의 가치를 초월합니다. 친정부냐, 반정부냐 하는 정파적 이해를 넘어섭니다. 생명의 가치는 무수한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 관계를 맺고, 공생하며 서로를 키우고 가꾸는 생태의 원리가 작동되는 지고지순한 우주의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생물다양성이 존재하는 생명의 터전 장항습지는 훼손되어서도 사라지게 해서도 안 되며 온전히 보존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강렬한 직관으로 정수리에 파고듭니다.

말똥 게 장항습지 버드나무 군락의 숲 갯벌 흙 속에 사는 말똥 게는 버드나무 이파리를 먹고, 뿌리 주변에 구멍으로 집을 지어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며 공생을누린다.
▲ 말똥 게 장항습지 버드나무 군락의 숲 갯벌 흙 속에 사는 말똥 게는 버드나무 이파리를 먹고, 뿌리 주변에 구멍으로 집을 지어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며 공생을누린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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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올레 뚜벅이 회원들과 함께 버드나무 군락 숲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숲에는 인위적 참견과 간섭의 흔적이 거의 보이질 않았고, 그 자체의 순수한 원시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했습니다. 흐릿한 매혹의 빛이 가득한 숲은 흡사 언젠가 아마존의 밀림이나 습지에서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스산한 고요함의 풍경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버드나무들이 서 있는 겨울날 마른 갯벌의 흙바닥에는 말똥 게의 집이자 습지의 공기구멍이기도 한 수많은 구멍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무수한 생명들의 치열한 생존의 노동이 만들어 낸 '대지미술'이 펼쳐져 있었고, 서로를 의지하고 돕는 공생의 매카니즘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밀물이 습지로 거슬러 올 때 찾아오는 갯골의 길도 마치 습지의 혈관처럼 곳곳에 퍼져 있었습니다.

신곡수중보 '서울 르네상스'와 '경인 아라뱃길'로 포장된 '4대강 사업'에 의해 신곡수중보가 일산대교 아래로 옮겨져 높게 세워지면, 장항습지의 60% 정도는 수몰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 신곡수중보 '서울 르네상스'와 '경인 아라뱃길'로 포장된 '4대강 사업'에 의해 신곡수중보가 일산대교 아래로 옮겨져 높게 세워지면, 장항습지의 60% 정도는 수몰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 박평수(고양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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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가치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박노해의 시에 베어있는 그 깊고 절절한 심정으로, 구체적 실천을 통한 참여로 사랑해야 합니다. 장항습지를 온전히 지켜내야 합니다. 관광과 개발이라는 천박한 토건자본 권력의 일방향성 논리가 불도저처럼 밀려오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는 것, 고양시의 값진 자산이자 국가적 자산인 장항습지를 지키고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이고 사랑입니다.

'서울 르네상스'와 '경인 아라뱃길'로 포장된 이른바 '4대강 사업'으로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가 일산대교 아래로 옮겨지면, 약 110만평에 이르는 장항습지의 면적은 60% 이상이 물에 잠기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을 품고 키우는 평화로운 장항습지는 우리 곁에서 사라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장항습지를 찾은 <고양올레>회원들 장항습지 생태탐방 겸 철새 모이주기를 마치고 들녘에 선 <고양올레>회원들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 장항습지를 찾은 <고양올레>회원들 장항습지 생태탐방 겸 철새 모이주기를 마치고 들녘에 선 <고양올레>회원들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 고양신문 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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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이 이 생명의 습지에 따뜻한 온기로, 위대한 희망 한 줌으로 뿌려질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이 고요의 빛나는 바다로,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로, 이슬 머금은 푸른 대지로, 숨쉬는 갯벌로 아름답게 전해지도록 함께 걸어 동행하며 오래도록 착하게 누리십시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20일 <고양올레>회원들과 장항습지 생태탐방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고양시에 역사와 문화, 생태와 환경을 아우르는 걷기 좋은 작은 길, 착한 길을 열기 위해 다음 카페 <고양올레>cafe.daum.net/gyolleh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양올레#고양올레 생태탐방#고양올레 장항습지#장항습지 생태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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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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