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첫 번째 신호등
"정신이 드니?"
리초가 눈꺼풀을 살며시 밀어 올렸습니다. 따오가 옆에서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응,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네 집 마당이지. 기억 안 나?"
"앵두!"
리초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앵두 어딨어?"
"걱정 마. 앵두 때문에 신호등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
따오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속삭였습니다.
"아, 다행이다."
리초는 나지막히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짜잔! 드디어 빨간 신호등이 만들어졌어요."
까치 부부가 신호등을 들어 올렸습니다. 앵두가 둥글게 신호등 모양을 만들었고 그 안에 산딸기와 붉은 꽃잎들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앵초가 가져온 빨간 앵초꽃도 있었고, 뚜루가 가져온 봉선화, 그리고 부들 박사가 물어 온 빨간 제라늄 꽃도 몇 송이 들어 있었습니다. 까치와 산비둘기가 각종 열매와 꽃잎으로 만들어진 신호등을 신호대에 매달았습니다. 드디어 빨간 신호등이 완성되었습니다. 동물들은 모두들 도로 옆 공터에 모여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괴물 하나가 달려왔습니다.
"정말 멈추어 설까?"
들쥐 까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는 동물들이 없었습니다.
씽-.
괴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신호등을 지나갔습니다.
"또 온다."
앵초가 소곤거렸습니다.
쌩-
두번째 괴물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큰 놈이다."
리초가 말했습니다.
부우웅.
세 번째 괴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호등을 지나쳤습니다.
동물들은 끈기를 갖고 기다렸지만 도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호등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아, 이제 어떻게 해. 여기에서 모두 굶어 죽어야 하나 봐."
까루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어."
청설모 설마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올리 할아버지도 눈물이 나는지 붉어진 눈가를 훔쳤습니다.
"그럴 순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건너가야 한다구."
너구리 뚜루가 울음을 삼키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이번 일로 문제는 간단해졌어. 괴물들은 우리가 만든 신호등을 보지 못해.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확실해졌다구!"
싸리가 싸울 듯이 올리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이제 한 번 시도해 봤을 뿐이야."
부들 박사가 큰 날개를 펼치며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올리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가만 있지 않겠어."
부들 박사가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싸리는 앞에 있는 돌멩이를 힘껏 찼습니다. 돌멩이는 피융 하고 날아가 까루 앞에 떨어졌습니다. 까루는 토끼 뒤로 후다닥 숨었습니다.
"싸리는 아직도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봐."
까루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앙띠에게 속삭였습니다.
구구가 신호등 위에서 기다리다가 공터로 내려앉았습니다.
"왜 괴물이 모르고 지나갔는지 잘 생각해 보자구요. 어쩌면 신호등이 너무 작아서 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좀더 큰 신호등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큰 신호등?"
까루가 되물었습니다.
"그래. 여기에는 지금까지 신호등이 없었기 때문에 크지 않으면 잘 보지 못할 거야."
"맞아. 구구 말이 일리가 있어."
부들 박사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큰 해바라기를 매다는 건 어때요? 동그랗기 때문에 신호등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까루가 눈을 반짝거리며 새로운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노란 해바라기로 신호등을 만든다구? 그랬다간 모두 놈의 밥이 되고 말 걸?"
싸리가 한심하다는 듯이 까루를 쳐다보았습니다. 까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남아 있는 빨간 꽃잎을 붙여요. 그걸 붙이면 깜쪽같이 빨간 신호등이 될 거예요."
앵초가 소리쳤습니다.
"그래 그래. 그러면 되겠다."
뚜루가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까루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습니다. 모두 다시 용기를 내었습니다. 흩어진 꽃잎을 주워 모았습니다. 까루 가족이 줄기를 갉아 커다란 해바라기를 가져왔습니다. 남아 있는 빨간 꽃잎을 붙이니 더욱 멋지고 커다란 신호등이 되었습니다.
"이제 해바라기 신호등을 매다는 일만 남았군. 쿨럭쿨럭."
올리 할아버지도 기쁜지 밝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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