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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한 젊은 남성이 갑자기 강연장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강사에게 테이크아웃 커피 박스를 턱 건넨 뒤 좌중을 향해 한쪽 팔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아임 루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곤 진행요원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28일 저녁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 특강 도중 벌어진 돌발 상황이다. 당황한 좌중 앞에 김 교수 자신은 아까 '예방주사'를 맞았다며 태연히 상황을 정리했다.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날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기획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11번째 특강 주제는 '마을 만들기: 돌봄과 소통의 공간을 위하여'였다. 이처럼 '루저'가 판치는 요즘 세상을 향해 김 교수는 관심의 공동체로서 '마을 만들기'란 화두를 던진 셈이다. 도대체 김 교수가 말하는 마을에는 어떤 비법이 숨어있는 것일까?

 

아파트 앞마당을 왜 자동차에게 내줘야 하나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에서 '마을 만들기, 돌봄과 우애의 정치경제를 위하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에서 '마을 만들기, 돌봄과 우애의 정치경제를 위하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유성호

김찬호 교수는 글로벌화와 정보화로 생활 반경은 넓어진 반면 이웃과 단절되며 점차 개인이 고립돼 가는 요즘 세상을 '결손 사회'로 정의했다. 결손 가정처럼 개인이 사회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러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10대 청소년 문제부터 청년실업, 노인문제, 나아가 최근 외모 지상주의가 낳은 '루저' 논란도 예외가 아니다.

 

김 교수는 결손 사회의 원인을 우선 '공공 영역의 부재'란 공간적 측면에서 찾고 있다.

 

"폭설로 모두들 직장에 차를 두고 오는 바람에 아파트 주차장이 텅 빈 적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이 나와 눈싸움하고 노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그동안 이 축제의 공간을 못 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교수는 수십 장짜리 슬라이드 통해 수강생들의 기억을 잠시 60~70년대로 되돌렸다. 김기찬 작가의 골목길 사진을 비롯한 옛 마을 풍경 속에는 하나같이 '삶'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동네 '아고라'였던 빨래터 아낙들을 비롯해 번듯한 놀이기구 없이도 해맑게 뛰어노는 골목길 아이들, 어린 손자손녀와 마실 나온 할머니들 모습까지. 이런 공간에선 주부 우울증도, 청소년 문제도, 노인 문제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70년대 한 일본인이 찍었다는 청계천 판자촌 컬러 사진에 초점을 맞췄다. 어설픈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그곳에도 어김없이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공유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 놀이터처럼 번듯한 놀이기구 하나 없지만 하루하루 아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노는 공간이었다. 한편으로 어른들과 공유하는 공간을 침범해 '금기'를 깨는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을을 안전하게 만드는 건 CCTV가 아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에서 '마을 만들기, 돌봄과 우애의 정치경제를 위하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2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오마이뉴스-휴머니스트 공동 특별강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에서 '마을 만들기, 돌봄과 우애의 정치경제를 위하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유성호

흔히 요즘 얘들은 대가족 속에 자라지 않아 버릇없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김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요즘 동네에서 아이들이 "형", "누나"하고 부르는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아이들이 또래들 하고만 어울리면서 윗사람과 어울릴 기회가 줄고 당장 성장한 뒤 윗사람과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과거 아이들은 마을에서 수많은 이웃 형, 누나, 어른들에 둘러싸여 자라며 말을 늘리고 어른을 존중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익혔다. 이런 인간적 고리 덕분에 마을은 CCTV나 온갖 안전장치 없이도 훨씬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 만들기를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당장 아파트마다 있는 주민자치센터에 동네 음악 하는 아이들 불러다 연주회를 열고 주민들과 만나게 해보세요. 그 아이들이 동네에서 허튼 짓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마을을 가장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법입니다."

 

마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노인 문제로 넘어간다. 고령화 사회에서 국가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노인들의 '외로움'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결국 의지할 곳은 가까이서 어울릴 수 있는 마을뿐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노인들 역시 '경로당'이란 공간에 가둘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 공간으로 끌어내 '역할'을 맡길 것을 주문한다. 노인과 유아, 또는 중증장애인과 치매노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노유복합시설이나 일본의 공생형 개호 시설을 그 사례로 든다.

 

이때 '돌봄'이란 흔히 오해하듯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돌봄'을 의미한다. 장애인이든 노약자든 서로 '역할'을 맡아 사회적 약자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이날 김우창 이대 석좌교수의 글 '큰 세계 속에서의 작은 삶' 일부를 인용하면서 강연을 마쳤다. 김 교수는 여기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큰 것'이 출세나 고소득, 명예를 의미한다면 가족, 이웃과 같은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이고, 그 작은 삶의 사회적 단위로서 지켜야 할 곳이 곧 '마을'이라고 해석했다.

 

'풀뿌리' 진영에서 마을 만들기는 낯선 화두는 아니다. 실제 김 교수 역시 충북 괴산 지역에서 진행되는 마을 만들기 실험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마을 만들기란, 지자체 등 행정에 모든 걸 맡기지 말고 주민 스스로 주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 훈련'이란 점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다. '마을'이 지방자치의 가장 밑바닥인 '작은 단위'면서도 국가와 같은 어떤 '큰 단위'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마을 만들기#김찬호#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휴머니스트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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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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