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호 대표를 만난 건(동시에 알게 된 건) 지난 10월 13일,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이 주최하는 언론학교에서였다. 그동안 사회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3년 만에 복학한 학교에서 언론학교 포스터에 있는 손석희 교수의 얼굴을 보고 주저없이 강의를 신청했다. 10명의 강사 중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손 교수뿐이었다.
수강생 중 유일하게 개근을 하며 10강을 다 들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이 사람들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었구나' 손 교수뿐 아니라 이정희 민노당 의원, 박수택 SBS 기자, 이춘근 MBC PD수첩 PD, 박경신 고대 법대 교수, 그리고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이사. 내가 몰랐다 뿐이지 그 사람들은 모두 유명한 사람들이었고 그 사실에 감격한 나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들과의 인연을 연장하고자 뒤풀이도 열심히 참여했고 오 대표의 수업에서 알게 된 '오연호의 기자 만들기(오기만)'라는 프로그램도 바로 신청했다.
31기를 맞은 오기만은 2박3일 일정으로 10월 30일에 시작되었다. 그곳에서도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 오 대표의 '기사쓰기의 ABC'를 복습하는 마음으로 듣고 4차례에 걸친 기사쓰기 실습을 통해 감각을 익혔다. 현직 기자의 생생한 취재 경험과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원장,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모르겠는데 나에겐 전부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왜냐하면 난 3개월 전만 해도 용산참사가 뭔지 모를 정도로 사회에 무심했으니까.
31기에게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12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의 짧은 인턴 기회. 나는 여전히 초보니까 그전에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에는 민언련이 주최하는 글쓰기 강좌를 들으며 기사쓰기를 연습하고 매일 신문과 여러 분야의 책도 읽어 교양을 쌓았다. 덕분에 그저께 확인한 학교 성적은 아주 저조하다.
'준비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인턴 첫날 나는 여성 동기와 서울역으로 노숙자들을 취재하러 갔다. 추운 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많은데 받아적지 않아서인지 사진을 찍지 않아서인지 기사로 쓰려 할 때는 나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뒤였다. 둘째날은 동지라 팥죽에 대해 써보고자 했다. 가게마다 새알 수를 세어볼까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 무작정 탄 전철에서 외국인을 보았고 이태원에 갔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짧은 영어로 동지를 아는지, 팥죽을 먹어봤는지 등을 물어보고 기사를 썼다. 두 기사는 지금 생나무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속상했다. '다른 동기들이 쓴 기사는 다들 잉걸이 되고 버금도 으뜸도 되는데 왜 나만... 역시 나는 기자가 될 재목이 아닌건가. 작가가 되고 싶지만 어디다 글을 써야 할지를 몰라 찾은 곳이 여기었는데 잘못 왔나 보다...'하는 생각이 여지없이 들었다.
셋째날, 매일 아침 오 대표와 함께 하는 기획회의에서 내가 생각해 온 기획안은 역시나 거부당했다. 하긴, '마법사(25세 이상의 동정남)의 혹독한 수련기- 크리스마스에 살아남는 법', '어째서 겨땀(겨드랑이땀)만 차별하나- 땀의 부위별 인식 차이'같은 거나 생각해오니 무시당할 수 밖에. 친구들은 "너는 남성잡지 GQ나 맥심이 어울리겠다"라고 위로해주었다.
취재가기 전에 한 개별면담에서 오 대표는 "넌 아직 뉴스가 무엇인지 모른다. 오늘은 집회나 시위 현장에 가서 스트레이트 기사를 하나 써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무상급식 예산 삭감 규탄 기자회견'에 대해 썼고 처음으로 잉걸이 되었다. '역시 난 재능이 있는건가?'
다음날 개별면담에서 오 대표는 "어제는 조금 잘했어. 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창의성은 나중에 발휘하고 오늘도 어제처럼 써봐"라고 말했다. 그래서 또 뉴시스에서 오늘의 주요 일정을 확인한 후 탑골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목요집회를 했기 때문이다. 그 기사 역시 잉걸이 되었다. '아, 생나무 전문기자에서 잉걸 전문기자가 된건가'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마지막 뒤풀이를 위해 만난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오마이뉴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구나'로 마음을 굳혔다.
1주일간에 얼마나 변했을까. 나는 얼마나 변했고 세상은 또 얼마나 변했을까. 그 시간속에서 나는 분명 '진화'했다. 한시도 가슴이 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언제 노숙자와 대화해보겠으며 국회 앞에서 인터뷰를 해보겠는가. 또 민가협이라는 단체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내가 참여하는 만큼 세상은 나에게 보답했다. 인턴이 끝나고 벌써 1주일이 다 되어간다. 집에서는 매일 틈만 나면 오마이뉴스를 들여다 보고 있고 밖에서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5505에 보내는 나를 보고 동생은 "또 소득없는 짓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소득은 '돈'일 것이다.
그래, 내가 그저께 쓴 기사는 또 생나무가 되었다. 돈 보고 하는거면 이 '짓' 못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하는 거다. 오마이뉴스의 저 유명한 슬로건 '모든 시민은 기자다'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이유다. 하지만 시간과 공을 들여 쓴 기사가 생나무가 되면 허탈한 건 사실이다. 인턴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읽은 오 대표의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기사의 공식을 파괴'해야 했다. '흠, 나의 파괴가 모자랐나. 나도 (시민)기잔데 내가 쓰는 기사는 기사가 아니구나.' 그렇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다른 조건도 요구했다. '그대에게 전할 만한 뉴스로서의 가치'를 지녔는가.
오 대표 말대로 나는 아직 뉴스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취재수첩을 들고 고민하고 있다. 그대에게 전할 뉴스를 찾기 위해. 지금도, 가슴이 뛴다. 'Can you feel my heartb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