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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면에 호랑이 부적이 실려 있다! 실려 있을 뿐 아니라 호랑이 부적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대명천지에 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인가 하고 놀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틀림없고 '명명박박'한 사실(fact)입니다.

2010년 1월 1일자 32면을 직접 찾아 보시죠. <돌아온 호시절> 기사 밑에, 가위로 자를 수 있게끔 친절하게 점선을 두른 빠알간 호랑이 그림이 보이실 겁니다. 거기에 달린 제목이 이렇습니다. <올 한 해 당신을 지켜줄 '호랑이 부적' 오려서 간직하세요>.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소장을 권유한 '호랑이 부적'(A32)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소장을 권유한 '호랑이 부적'(A32) ⓒ 조선일보

어떻습니까? 시대를 거슬러 역발상의 아이디어로 독자들에게 부적을 선물하는 조선일보의 서비스 정신이? 참말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기가 막히다 못해 "졌다" 소리가 입에서 신음처럼 절로 새나오지 않습니까?

경인년 호랑이 해를 맞아 신문지면에 호랑이 부적을 그려넣어 독자들에게 나눠주자는 이런 도발적인(?) 발상을 할 수 있는 신문지는 전우주에서 아마 '대한민국 일등신문' 조선일보밖에 없을 겁니다. 세상에 역술신문 외에 어떤 신문지가 밀레니엄 하고도 10년이 더 지난 지금 이따위 정신나간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것은, 편집의 일관성 면에서 말이 안됩니다. 부적은 그림 밑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옛조상들이 부정한 액운을 피하기 위해서 소지하는 겁니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호시절'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요.

그런데 부적이 자리한 32면의 톱을 장식한 제목이 무엇입니까? <'돌아온 虎시절'...2010년엔 '호랑이 기운'이 솟을 거에요> 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영도하는 2010년을 부러 '好시절'을 연상시키는 '虎시절'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세요. 이것만 봐도 조선일보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목만 그런 게 아닙니다. 기사 내용도 즐거운 기대로 충만합니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길조의 동물이라서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면 취직을 하고, 호랑이가 집안에 들면 승진하는 꿈이다. 호랑이가 가만히 있으면 행운이 오고, 호랑이를 죽이면 중요한 일을 맡는다"고 합니다.

여기 어디에 액운의 그림자가 어른거릅니까? 그래놓고서 생뚱맞게 "액운을 막는 부적을 오려서 간직하라고" 하니, 자동으로 양미간이 좁혀지고 "호랑이 기상이 솟을 것"이라며 "돌아온 호시절" 운운한 기사의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게다가, 미신적 사고를 타파하고 과학정신을 계몽.고취시켜야 할 신문지가 오히려 미신 따위에 지나지 않는 부적을 간직하라고 사람들을 꼬드기고 부추긴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입니까. "부적이 미신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뭔가를 해결해 줄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신문지가 말에요.

"부적은 미신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뭔가를 해결해 줄 리 없다. 사람들이 첨단과학의 시대에까지 부적에 집착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약한 존재이며, 불행을 피하고 복을 불러들이려는 열망은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한달여 전에 작성된 2009년 11월 25일자 만물상 <1000년 된 부적>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쓴 김태익 논설위원은 새해 첫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선일보가 "미신에 지나지 않고" 또 "뭔가를 해결해 줄 리도 없는" 호랑이 부적을 가위로 오려서 간직하라고 홍보하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얼굴이 뜨끈해지지는 않았을까요?

뿐더러,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규태 씨도 오랫동안 연재했던 자신의 기명칼럼을 통해 부적의 폐해와 악습을 여러차례 나무랐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고통을 받을 때 사람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을 한다. 그 의존수단이 부적이다... 요행과 미신에의 의존이 크면 노력과 실력에 등한하는 반비례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라 경제는 파탄하여 기우는 배요 그 선상에서 미신상업은 호황이니 불길한 조짐이 아닐 수 없어 더욱 그렇다."(<입시 미신상술>, 1997.10.23)  

"최첨단 과학 수단인 인터넷과 최후진 미신 수단인 부적이 야합하여 판을 치고 있다... 소원 같은 인간의 마음을 과학이 다스리기에는 아직도 요원함을 말해 주는 문명현상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그 맹렬 미신이 인터넷까지 침범한 셈이다."(<인터넷 부적>, 2002.10.19)

앞에서 부적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개탄하고 뒤돌아서 부적을 간직하라고 꼬드기는 조선일보의 엽기적인 두 얼굴이 이 정도입니다. 연즉, 이걸 보고서 어느 누가 두 손 두 발을 들고 "졌다"고 복창하지 않겠습니까.

각설하고, 조선일보는 지금이라도 정직하게 해명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정론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역술신문'은 아닌지, 그리고 2010년이 '호시절'이라는 조선일보의 말을 과연 믿을 수 있고 믿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올 한 해 당신을 지켜줄 '호랑이 부적'을 오려서 간직하세요"라는 조선일보의 뜬금없는 친절을 당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심히 난감해서 하는 말입니다.


#조선일보의 두 얼굴#조선일보와 '호랑이 부적'#경인년 호랑이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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