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답사기행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먼저 떠오르는 책은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다. 그것이 국내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신영복 교수가 쓴 <더불어 숲>은 해외를 토대로 국내 역사·문화와 소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둘만으로도 우리 것과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이 어떤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한홍구 교수가 또 다른 국내 문화 답사기를 펴냈다. 이른바 평화라는 눈길로 한국근현대사를 밟아 쓴 <한홍구와 함께 걷다>가 그것이다. 이 책은 그가 대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 유적지를 발로 밟으면서 강연한 기록물이기는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감춰진 것들이 지닌 의미들을 불러오는 답사기를 기록했노라고 밝힌다.
그는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통해서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음직한 '불경스런' 생각을 떠올린다. 바로 야스쿠니 신사 앞에 있는 전사자 명부가 그것으로서,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첫 관문에도 그와 같은 전사자 명부를 똑같이 내세우고 있으니 씁쓸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쟁기념관에는 평화는 없고, 있다면 오직 호전적인 기상과 군국주의 의식만 불어넣고 있으니 더욱더 편치 않은 마음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김순덕 할머니의 <못다 핀 꽃>이다. 어느 주택가에 버려진 병풍을 주워다가 병풍에 놓여 있는 꽃무늬 자수 속에 열여섯 곱디고운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은 정말 보는 이의 숨을 콱 막아 버린다. 아 그랬었구나! 이렇게 고운 열여섯 아이들이었구나. 할머니가 끌려간 게 아니었구나. 그 새삼스런 발견에 가슴이 저려 온다."(46쪽)
이는 열여섯 살 꽃 같은 나이에 일본군 병사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성폭행을 당하며 모진 세월을 보냈던 '종군위안부'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한 말이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원당리에 있는 나눔의 집 '제 4 전시공간-고발의 장'에는 그곳 할머니들이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분들은 개인이 아닌 단체가 와서 신청하면 그 고통스러웠던 옛 기억들을 끄집어내 들려주시는데, 한결같이 당신네들과 같은 불행한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공포정치를 일삼았던 무대 '남산'과 민주화를 성스럽게 이끌었던 '명동성당'에 관한 부분이다. 그가 말하는 남산이란 1970년대와 80년대에 국가폭력을 주도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일컫는데, 지금은 서울 유스호스텔과 서울종합방재센터가 대신하고 있는 까닭에, 아우슈비츠 박물관과 같은 원형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한다. 아울러 70년대와 80년대에 명동성당이 민주화를 위해 농성장과 기자회견 장으로 수시로 내 놓았는데, 이제는 마음만 고향뿐이게 만드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 전한다.
"국상이 끝난 밤, 나는 광장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근 1년 만에 밟아보는 정든 아스팔트였다. 누군가가 다시 광장에 선 감회가 어떠냐고 물어 왔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이게 우리 광장인데, 우리 광장에 다시 서기가 이렇게 힘드네요. 노무현 대통령을 바치고서야 우리가 겨우 한 번 이 광장을 밟아 보네요. 이게 이렇게 비싼 땅이네요."(230쪽)
이는 1987년 6월 이한열군을 떠나보내던 그 항쟁 때에, 당시 젊은 한홍구도 수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다 결국은 전경들이 쏴 대기 시작하는 페퍼포그로 인해 뒤뚱거리는 민주주의와 함께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9년 5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상이 끝난 이후 또다시 그 광장에 차벽이 쳐지는 것을 보고서, 그는 더 멀리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보고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회한이 밀려들었으면 그랬을지 짐작이 간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국립서울현충원, 경복궁, 서대문형무소, 강화도, 국립4·19표지, 인천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등 굴곡이 많았던 한국 근현대사 곳곳을 둘러 볼 수 있으며, 그 곳곳 너머를 통해 그가 읽어내는 평화에 관한 시선이 얼마나 진지한지, 이전에 나와 있는 문화답사기와는 또 다른 깊은 맛을 진정으로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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