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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눈길에서 차가 미끄러져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1991년, 벌써 19년 전 일이다. 공주 처가에 갔다 오던 길이었다. 처가에다 아내와 젖먹이 아들녀석을 두고 네 살배기 딸아이만 데리고 오면서 도중에 눈을 만났다. 내리면서 녹는 눈이어서 조금 방심을 했다. 서산시 해미면과 고북면 사이 곧은길을 50Km 정도의 속도로 달리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차가 제멋대로 이리저리 방향을 틀더니 내 차선 쪽 가로수를 들이받으면서 옆으로 누워 버렸다.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는 순간 내가 반사적으로 맨 먼저 한 일은 옆에 타고 있는 딸아이의 상체를 한 손으로 붙잡는 일이었다.  

 

 재빨리 아이를 힘껏 붙잡았지만 아이는 조수석 앞턱에 부딪쳐 한쪽 뺨에 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다. 옆으로 누워 버린 차의 한쪽 문을 간신히 열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안고 차 밖으로 기어 나올 때의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선연하다.

 

 다행히 사고 순간 뒤따르던 차도, 마주 오던 차량도 없어서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비공장으로 끌려간 차는 고물차인 데다가 수리비 견적이 너무 많이 나와서 폐차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소유했던 푸른색 9인승 봉고 승합차인데, 정든 차를 폐차장으로 보낼 때는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차를 폐차장으로 보낼 때의 미안한 감정, 그것이 내겐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 뒤로 나는 겨울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눈만 보면 잔뜩 겁을 먹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엔 여간해선 차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신조처럼 되었고, 겨울철에 먼길 나들이를 할 때는 기상예보에 바짝 신경을 쓰곤 했다.

 

 생업으로 차를 운전하지는 않지만 일상 생활에서 차 운전은 내게도 필수인데, 겨울에는 눈 때문에 행동 제약을 감수하게 되고 또 그만큼 불편을 겪어야 하니, 눈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눈 덮인 은색 세상을 보고 감상에 젖는다든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처음 걸을 때의 감흥 따위도 내게는 시덥지 않은 일이 되었다.

 

 <2>

 

 소년 시절에도 눈은 내게 별로 정다운 사물이 아니었다. 겨울철 눈이 쌓인 산에 나무를 하러 간 날이 많았다.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때고, 취사와 난방을 거의 나무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겨울에는 인가에서 먼 깊은 산으로 가서 소나무 가지를 쳐오곤 했다. 나무를 베는 것은 아니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낫으로 가지를 몇 개씩 치는 것인데, 산 임자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여기저기 여러 나무에서 쳐 내린 솔가지들을 주워 모아 지게로 지고 올 때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짝 조심해야 했다. 고무신에다가 새끼를 두세 번씩 동여매고 걸음을 떼면서도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한 번은 너무 오지게 넘어져서 지게 뿔을 분질러먹고, 논배미 눈 속에 처박힌 나뭇단을 간신히 끌어 올려놓고 나서 나뭇단 위에 걸터앉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군대 시절에도 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남은 6개월을 중동부 전선 대성산에서 보냈는데, 철책선 근무로 들어가기 전에는 거의 매일 대성산을 오르내리며 눈을 치우는 일과 화목(火木)을 해 나르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

 

 참 지겨울 정도로 눈을 많이 치웠다. 산길에서 불을 피워 반합에다 밥을 해먹으며 하루종일 제설작업을 하곤 했다. 작전도로의 눈을 다 치웠다 싶으면 화목 작업을 하는데, 무거운 나무토막을 메고 눈길을 걷다가 넘어지는 병사가 많았다.

 

 우리 분대원이었던 한 병사는 분대 살림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치밀하고 알뜰한 사람이었는데, 큰 나무토막을 메고 눈길을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나무토막이 머리를 친 바람에 그만 정신을 잃고 긴급히 후송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우리 부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기 제대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후 어찌 되었는지, 살아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이처럼 나는 눈과 좋은 관계가 아니다. 좋은 추억을 만들지도 못했다. 소년 시절 온 산에 하얗게 눈이 덮인 날 친구들과 함께 토끼사냥을 한 기억이 있는데, 그것도 좋은 추억은 아니다. 겨울가뭄이 심하던 어느 해 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환호한 때도 있긴 하지만, 눈은 내게 영 반갑지 않다. 은색으로 변한 세상을 보고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기온은 얼마든지 내려가도 좋으니 제발 눈만은 오지 말았으면 하는 기원을 겨울에는 꼭 안고 산다.                   

 

 겨울철에 눈이 오지 않을 수는 없으니, 오기는 하더라도 밤에나 오고, 아침에는 햇살이 활짝 퍼졌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3>

 

 올해는 눈이 더 밉다. 연초 주말을 보내고 일상 업무를 시작하던 지난 4일 새벽부터 엄청난 폭설이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을 강타했다. 갖가지 수많은 피해가 속출했다. '교통대란'이 벌어지고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전국 곳곳에서 줄을 이었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도 많다.

 

 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 생각을 하면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 또 눈 때문에 생고생을 하는 사람들, 갖가지 고생스런 풍경들을 보노라면 가만히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다행스럽기보다는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다.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가 했더니 이곳(충남 서해안)에서는 오늘(6일)도 눈발이 날린다. 너무도 심란하여 절로 한숨이 나온다.      

 

요양병원의 노친과 함께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요양병원을 매일 두 세번씩 가서 노친을 돌보아드리는 일이 요즘의 즐거운 주요 일과다.
요양병원의 노친과 함께자동차로 5분 거리인 요양병원을 매일 두 세번씩 가서 노친을 돌보아드리는 일이 요즘의 즐거운 주요 일과다. ⓒ 지요하

 나는 요즘 매일같이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서해안요양병원(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을 하루 두세 번씩 다닌다. 그곳에 노친이 계시기 때문이다. 노친께서 요양병원에 계시게 된 사정과 내가 매일같이 요양병원을 매일 두세 번씩 가는 이유는 지난해 말에 올린 <암에 걸린 86세 어머니와 병상일기>라는 글에 자세히 기술되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기술을 생략한다.

 

 그런데 눈 때문에 애로가 많다. 눈만 보면 겁부터 먹는 습성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가 더욱 어렵다. 병원의 아침식사 시간에 맞추려면 7시 15분쯤에는 집을 나서야 하는데, 요즘 며칠 동안은 이른 아침의 빙판길이 두려워서 아침에 가지 못한 날이 벌써 여러 번이다.

 

 노친의 식사를 도와 드리고 식사 후 약을 챙겨 드린 다음에는 몸을 주물러 드리며 변의(便意)가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로 모시고 가기도 하는데, 그러려면 1시간 정도는 병실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창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되면, 저녁부터는 길바닥이 얼어붙을 것을 염려하게 되어 서둘러 병원을 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언젠가 한 번은 어머니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머니, 아무 때나 화장실 신호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세요. '하느님, 우리 아들이 병원에 와 있을 때 화장실 기별이 오도록 해주세요'라고 매일 기도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알았어. 그렇게 허께"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병실의 할머니들이 모두 웃었다. 어제는 아직 신호가 없다고 하셔서 "우리 아들이 병원에 와 있을 때 화장실 기별이 오게 해달라는 기도 안 하셨죠?"라고 여쭈니, "자꾸 그 기도를 까먹어"라고 하셔서 또 한번 병실의 할머니들이 모두 웃었다.

 

 병원 가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갈 때마다 병실의 할머니들을 모두 즐겁게 해드리려고 애를 쓴다. 방학중인 아내는 병원에 만두도 만들어가고 동태전도 부쳐 가고, 오늘 낮에는 김밥도 만들어 갔다. 그런데 요즘 병원 가는 일에 매번 걱정이 앞선다. 눈이 여간 방해를 하는 게 아니다.

 

 <4>

 

 이렇게 눈 때문에 애로와 고충을 겪는 판에 이명박 대통령의 '축복' 발언을 듣게 되었다. 이명박 대톨령이 국정연설을 하면서 "오늘 출근길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만,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는 것을 보니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듯하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100년만의 폭설이 "새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걸까? 사람에 따라서는 연초의 하얀 눈 세상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출근길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라는 말 다음에 축복 운운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면서도(제대로 체험적으로 알지는 못했을 테지만) 어떻게 태연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네 명의 장관이 지각한 것과 관련하여 "오늘같이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지하철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지하철의 대혼란을 도외시한 무지에 가까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도 빈약하고 사려도 깊지 못한, 너무도 지혜롭지 못한 대통령의 발언에 이 민초는 그저 한숨을 쉬며 창 밖의 나부끼는 눈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슬픈 심정이었다.

 

 공연한 소리 한마디 해본다. 만약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오늘 같은 폭설 가운데서 축복 운운의 발언을 했다면 조중동이 가만히 있었을까?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하고, 뭐라고 했을까? 온갖 험한 소리로 난리를 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폭설#교통대란#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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