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언>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대로 과연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일까?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는 쉬울지 몰라도, 사망한 공산주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로 온통 물든 세상에서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로 돌아가자고 핏대를 세우는 이가 과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이는 책에서만 인용되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생긴 내가 가진 질문들 가운데 하나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역사의 종언이 9·11테러로 정치 부문,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 부문에서 틀렸음이 입증됐고 그리하여 역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므로, 위기에 대한 대안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유효한가?
1990년 슬로베니아 대선 후보로 출마한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기도 한 그가 자신이 주창한 '재창조된 공산주의(Reinvented Communism)'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규율 있는 테러(disciplinary terror)'라며 도발적인 언사를 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동시대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비난과 동시에 문화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조롱받기도 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나는 강연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뉴델리에 위치한 인디아 해비태트 센터 강당에서 화요일 5일 저녁 7시에 예정된 강연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나는 정문 앞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2007년 10월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의 강연을 별무리 없이 좋은 자리에 앉아서 들을 수 있었던 경험 때문에 느긋했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좌석이 매진되자 출입문을 걸어 잠근 주최 측은 시끌벅적한 항의에 시달리자 마지못해 '입석' 혹은 '바닥석'을 조건으로 문을 열었다.
극좌파 낙살라이트, 공산당, 사회당에서부터 극우정당 시브세나까지 공존하는 나라다 보니 유명 정치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듯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린 탓에 15분 정도 지연된 후 강연이 막 시작되기 전, 통로 바닥에 앉아 있던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남인도 여성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됐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후 옆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야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1997년 첫 번째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아룬다티 로이였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소설가에서 반전, 반핵, 페미니즘, 하층민 인권을 위한 활동가로 변신한 그녀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과격 공산주의자의 이데올로기 강연에 실망한다면 그녀를 본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작정이었다.
스타벅스 마시며 제3세계 돕는다?
잠시 후, 불룩 나온 배에 검정 라운드 반팔티셔츠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동유럽 얼굴의 늙은 남성이 등장하더니 퍼포먼스 같은 도발적인 강연이 시작됐다. 괴상한 영어 발음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는 자신의 신간 <우선 비극, 다음은 희극>(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족, 공장, 학교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통합체로 발전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이 알튀세르 같은 좌파 이론가들의 주장을 따르고 발전시킨 듯했다.
이 시대를 행동하지 않는 '냉소의 시대'라고 단호하게 규정하면서, 그는 현대인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제3세계 노동자, 불우한 이웃 등을 간접적으로 돕게 된다는 광고 전략에 넘어가는 모습을 질타했다. 직접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냉소주의로 인해서 자본가들에 놀아나는 현대 소비주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태도라는 주장이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야말로 진보주의자이며 그를 쓰러트리려는 세력은 왕정복고를 위한 반동 지배세력이라는 주장과, 영화 <죠스>의 상어는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사회주의를 상징한다는 주장은 그의 이어지는 파격적인 '막말'에 비하면 약과였다.
인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하느님만 찾았다면서 성녀 마더 테레사를 비난할 때 벌어진 내 입은, 프로이드나 라캉처럼 정신분석학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이 학창 시절 억눌린 성적 욕구로 여선생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농담 섞인 폭로에는 더 이상 다물 길이 없었다. 불꽃놀이 같은 그의 언변 행간에 던져진 핵심은 바로 "바보들아, 문제는 이데올로기야"였다. 쉬운 예를 들어서, 물건을 만들고 사는 일이 더 이상 단순한 시장 행위가 아닌 경험을 사고파는 이데올로기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창하는 '재창조된 공산주의'는 가난한 국가들만이 아닌 유럽 등 모순점들이 팽배한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그는 2008년 금융위기야 말로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의 망상이 파괴된 일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나는 지금의 이러한 위기가 나오미 클라인이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라고 지적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규율 있는 테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데 대해서 그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수사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스탈린식의 공포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모든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새로운 대중적 규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나의 동료인 알랭 바듀(Alain Badiou)가 말하기를 '자유와 자유를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무기는 바로 규율'이라고 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당신은 '필로테이너'
이런 생각을 가진 그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영화는 재앙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소년이 행운을 거머쥔다는 할리우드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겁니다. 거기다가 인도의 불행한 현실을 모두 다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죠."
할로윈 파티에 참석한다면 무슨 복장을 하겠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악마의 복장을 하겠다고 질문자의 기를 죽인 다음, 재치 있게 인도의 피에 굶주린 칼리(Kali) 여신을 예로 들었다.
"팔이 100개나 달린 칼리 여신도 팔 하나는 선한 곳에다가 쓴 답니다. 그래서 나도 보기보다는 나쁘지 않으니까 두려워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선한 악마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 보여주는 그의 퍼포먼스 같은 강연에 박장대소와 아연실색을 오가던 청중들의 반응은 그가 상아탑 속에 갇힌 철학자도 권력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정치가도 아님을 보여주는 듯했다.
강연장을 나오면서 나는 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방식으로 그의 직업인 철학자 뒤에다가 엔터테이너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다. 철학자이면서도 대중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필로-테이너(Philo-tainer)'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주지는 않았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에 관계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케케묵은 공식을 바꿔야 합니다. 철학자들이란 세상을 해석하기만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했죠. 하지만 20세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행동도 중요하지만, 사상 없는 행동은 재앙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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