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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서 나를 보기만 하면 쪼르르 달려와 내년에는 꼭 자기반 담임이 되어달라고 졸라대던  아이가 있었다. 내가 담임을 맡으면 학교생활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랬을 테지만 그런 속내를 감추고 순수한 사랑을 고백하듯 눈을 반짝이며 엄지와 검지를 지그시 눌러 사랑의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는 아이에게 나는 이렇게 넌지시 말했다.  

 

"사랑은 징그러운 거야. 우리 사랑은 하지 말고 바람이나 피우자."

 

이게 어디 교사가 학생에게 할 말인가? 다행히도 그 아이는 내 말의 진의를 알아차린 듯했다. 막상 담임을 맡다보면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원수지간이 되기 십상이니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처럼 가끔씩 눈이나 마주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이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불량교사의 엉큼한 수작에 비하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모범적이었다.   

 

"바람은 무슨 바람, 아무리 징그러워도 진짜 사랑을 해야지요."

 

아쉽게도, 올해 나는 그런 진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랑스러운 제자 아이와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한 해 동안 내가 징그럽게 사랑해야할 아이들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담임 배정이 있던 날 후배교사인 이 선생과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나 이 선생 반 애들 맡았어."

"예? 선생님 우리 반 애들 못 잡아요."

"이 선생이 잡는데 내가 왜 못 잡아?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잡는 데는 사랑만큼 확실한 무기도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날 대화의 양상이었다. 몇 년 전만 같아도 후배교사와의 대화는 이렇게 돌아갔으리라.

 

"나 이 선생 반 애들 맡았어."

"예? 선생님 우리 반 애들 못 잡아요."

"애들을 잡긴 왜 잡아? 나 애들 사랑할 거야."

 

물론 어쩌다가 대화가 그렇게 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대꾸를 해놓고 문득 내가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갔던 것을 보면 뭔가 수상한 생각이 든다. 최근에 쓴 교단일기를 다시 읽어보아도 그런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지금 자못 심각하다. 아이들을 잡을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지난 주 부산에 사는 윤지형 선생님이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그동안 모 교육잡지에 연재해온 글을 단행본으로 펴내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나를 취재(탐구)한 글을 보내주신 것이다. 기존에 탐구했던 교사들의 '근황'에 대한 글을 각 꼭지마다 붙이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대략 6년 전에 쓴 '윤지형의 안준철 탐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울어야 할 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세 인물 중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죽이겠다'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울도록 만들겠다'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교사 안준철은? 그는 아무래도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오직 사랑하겠다.' 

 

그의 비해 독서량이 턱 없이 부족한 나는 그가 소개한 이 '유명한' 고사가 '금시초문'이었다.  다만, 세 인물의 면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답이 참 그럴듯하다 싶었다. 문제는 교사 안준철의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어, 그런가?"하고 반신반의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딱 내 대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장황하게 써놓은 한 교사의 순애보가 사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도. 

 

난 본래가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 자신을 추겨 세울만한  위인도 못된다. 그렇게 해보았자 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처세술로서 겸손함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겸손함을 보이기 위해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순수성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도 누군가 나를 저주하고 싶다면 이렇게 주문을 외우면 된다.

 

"사랑 없는 교사가 되거라!"   

 

이쯤 되면 웬만큼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살을 찌푸릴만하다. 하지만 글줄을 읽었거나 그에 버금가는 삶의 혜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나의 터무니없는 오만과 자신감에서 오히려 반전의 순간을 기대하고 있을 법도 하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초라하고 강파른 모습을 머리에 그리면서. 그렇다. 나는 지금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흔들리면서도 분명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담임 배정이 끝났지만 나는 아직 아이들을 잘 모른다. 그들이 사랑할만한 아이들인지 잡아야할 아이들인지.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만, 올해부터는 그 사랑이 너무 징그럽지 않도록 내 자신부터 잘 단속할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아픔이나 실패는 거지반 교사인 나의 미숙함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되,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그들을 대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사랑의 교사'라는 거창한 호칭보다는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도와주는 교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아예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사랑의 주체를 넘겨주면 어떨까? 그들이 주인이 되어 선생인 나를 더 많이 사랑하도록 말이다. 물론 사랑의 아픔도 감내하면서. 사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이른바 '참교육'이기도하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에 앞서 자신의 생명과 삶을 귀히 여기고 가꿀 줄 아는 아름다운 한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 그 사랑의 일을 돕기 위해 내가 교사로 존재한다는 것.

 

만약 그것을 '사랑의 자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 분야를 점검하는 세계 기구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하위 수준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 책임은 교사인 내게도 있다. 슬픈 것은 오랜 세월 그 책임을 방기해온 나의 직무유기에 대해서 아무도 탓하거나 충고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의 내적인 성장은 우리 교육의 자장으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아이들 앞에서 '사랑의 자치'를 선포할까 한다. 아마도 그런 말을 처음 듣는 아이들은 그게 도대체 뭐냐고 내게 묻을 지도 모르겠다. 그 중 유독 말을 잘 안 듣게 생긴 한 녀석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여줄까, 생각중이다.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야.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일부가 수정되어 단행본 '윤지형의 교사탐구(가칭)'에 실릴 예정입니다.  


#순천효산고등학교#사랑의 자치#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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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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