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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의 말이 떨어지자 뒤쪽에 자리 잡은 나장들이 연호했다. 그들은 '이실직고하라!' '여쭈어라!'고 윽박질렀지만 내심 불만이었다. 이 사내가 예를 갖춰 다룰 자인가. 궁이 어딘 줄 알고 감히 칼을 빼들고 상감을 해치려 한단 말인가? 그가 노린 건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의 목이었다. 그런 자를 유약하게 다룬다는 게 말이 안됐다. 당장 뼈를 분질러 단근질로 살가죽을 태워 요절을 내도 시원찮을 판에 상감의 말은 너무 부드럽지 않은가.

"죄인은 들어라! 과인은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매질하거나 유배 보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서로 화락하며 지내기를 원한다만, 그런 과인에게 무슨 연유로 칼을 빼들었느냐?"

여전히 눈을 감은 전흥문에겐 상감의 목소린 구름바다 저 편에서 새어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오랏줄에 묶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득 몇 해 전의 일이 되살아났다.
마포 강가의 투전판이 벌어지는 객주 집 봉노방에서 우연히 홍상범을 만났다. 석 달 노임으로 받은 이백오십 냥을 반나절 투전에 거덜 내고 울컥 부아가 치밀어 막걸리를 마실 때 홍상범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힘깨나 쓸 장정이 투전판은 웬일인가?"

힐끗 쳐다보며 단숨에 막걸리 잔을 비우며 왼손으로 쓰윽 턱밑 수염을 훔쳤다.

"보긴 잘 봤소. 어쩌다 낀 투전판이지 즐기는 건 아니오. 가까이 지내던 놈이 내 돈이 탐이 나 날 투전판에 끌어들였소. 그놈 어미가 황달로 고생이 심해 그만 뒀지 그렇지 않았음 그놈 발모가지는 거덜 났을 게요."
"거 마음자리 한 번 넓소이다. 한데 무슨 일을 했기에 석달 노임이 그리 많소?"

전흥문은 시답잖은 표정으로 탁배기 잔을 들이켜더니 한 손으로 입언저리를 쓰윽 닦았다.

"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자리였소."
"그 자린 왜 그만 뒀소?"
"같은 사람을 오래 두지 않는 모양이오. 그러니 나올밖에 도리가 있소. 도검에 의지하는 나 같은 위인이 살아가는 건 다 그렇다오."

전흥문이 있었던 곳은 금광이었다. 광맥을 발견하거나 인부들을 감독하는 이들은 상당한 노임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랐다. 광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알게 된 친구와 마포에 당도해 투전판에 끼어든 게 홍상범을 만나게 된 동기였다. 그는 상대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몇 가지 시험을 하고 나서 은근히 속삭였다.

"그 동안 여러모로 댁을 살폈는데 우리 일에 적임자란 생각이오. 당신 앞길을 보장해 줄 것이니 뜻을 함께 하는 게 어떻소?"

반신반의했으나 상대의 말 주변에 전흥문은 말려들었다. 주종관계의 서약을 하고 홍상범의 노비 초희(初姬)를 아내로 맞아들인 한편 보금자리 마련으로 일천오백문을 받았다. 배가 불룩하게 솟아오른 수심에 찬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이놈! 어서 입을 열어라! 어찌 말이 없느냐?"

대로하듯 외치는 소리에 국문장으로 돌아온 현실은 전흥문에겐 고통이었다. 아무리 봐도 살 길은 없다. 일을 시작했을 때엔 죽기를 작정하고, 거사가 성공하면 큰자리 하나 꿰찰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몰골은 그런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홍상범의 말에 마음을 열고 새로이 보위에 오른 상감이 복수에 미쳐 있다고 세뇌를 당해 온 그였으나, 친국이 벌어진 그 자리가 전흥문은 마음이 편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상감은 홍상범의 말처럼 복수에 혈안이 된 인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진짜 성군일지 모른다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사내였다. 자신이 택한 일이고 그것이 실패했으니 선택은 죽음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담담했고 거듭되는 상감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심난해 하는 상감을 보다 못해 홍국영이 나섰다.

"전하, 이 일을 신에게 맡겨 주옵소서. 마마께선 자비를 아껴야 하옵니다."
"자비를 아끼라?"
"죄인을 다루는 건 학문 연구와 다르옵니다. 전하께선 고대의 법률 오형청(五刑廳)의 깊은 매력에 끌리셨으나 그건 일반적인 것이지 중범죄의 경운 아니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홍승지?"

"오형청이 옳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죄인을 심문할 때 본인이 직접 현장을 목격했거나 다른 목격자가 증거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오나 모든 법에 전하를 시해코자 역적모의를 한 무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온당치 못합니다. 이들에겐 국법의 준엄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죄인이라도 동정하는 건 인(仁)이 아닌가?"
"인과 덕을 어찌 국법을 어긴 죄인에게 준용하리까. 전하, 죄인의 치죄를 신에게 맡겨 주옵소서."

상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히 치죄를 양보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홍국영이 죄인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런 놈을 보았나! 천하에 다시없이 어지신 상감마마를 해하려 칼을 뽑아 궁으로 들어와? 이놈! 네 따끔한 맛을 보아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어서 말하라! 네 놈의 뒷배가 누구냐? 어느 놈이 너를 사주해 상감마마를 해하라 했느냐?"

전흥문이 쉬이 입을 열지 않으리란 생각에 홍국영은 한 걸음 뺐다. 어찌 보면 여유있는 듯 했으나 이것은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였다. 모진 말이 단번에 튀어나왔다.

"죄인이 아직도 꿈꾸는 것 같다. 정신이 확 들도록 해 주거라! 형옥에 있는 도구를 맛보이려면 여러 날 걸릴 터, 작은 것부터  맛이 매운지를 보여야겠다. 얘들아, 나장!"
"예에!"
"우선 죄인의 볼기를 까고 소곤(小棍) 열만 안겨라!"

나장들은 연신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인'이니 '덕'이니 그런 건 알 바 없었다. 그들에겐 죄를 지은 중범자를 어떻게 다스리는 가에 이력이 있었다. 너그러운 상감보다 시원하게 벌을 내리는 홍국영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 그들의 대꾸엔 신바람이 살아돋았다. 형리들은 모든 동작에 익숙했다. 나장 둘이서 4푼 두께의 소곤을 찾아들고 좌우로 갈라섰다.

"쳐라!"

홍국영의 한 마디에 이내 철썩 철썩 난타가 시작됐다. 하나요, 둘이요를 외칠 때마다 따악, 딱!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분위기를 긴장시켰다. 그런데도 죄인은 표정 하나 변함이 없었고,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았다. 홍국영의 말소리가 분위기를 자극했다.

"어허, 그렇게 다루어 얼마나 가겠느냐. 살갗이 터지지 않도록 조심들 하라니까. 그 녀석의 허우대가 그만 하니 어지간한 매질은 참을 수 있을 게야. 허니, 사정을 둬 가며 매질할 여분을 남겨 놓아."

"아, 예에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친국을 맡은 홍국영은 단번에 끝내려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벌면서 오랫동안 죄인을 물고내 반역의 근본을 뿌리 뽑으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도를 나장들은 좋아했다. 열 번의 소곤 질이 끝나지 홍국영이 다그쳤다.

"주모자가 누구냐?"
"모···르···오."

나장들이 축 늘어진 전흥문을 마구 흔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서 대라! 사실대로 불어!"

들끓는 듯한 호통이었지만 전흥문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홍국영이 빙글 웃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가. 이번엔 다른 명령을 내렸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네가 죽지 않은 이상 심문은 계속될 것이다. 혹여 네 놈이 혀를 깨물어 자진한다면 침술로 회생시켜 반생반사의 상태에서 혹형을 가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벌을 받으면서 말을 하고 싶거든 그때 입을 열어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나장들에게 다시 영을 내렸다.

"이번엔 좀 더 실한 것으로 할 것이다. 중곤(中棍)으로 스무 대만 다스려라!"

중곤은 5푼 두께의 버드나무 몽둥이다. 그것으로 스무 대면 어지간한 장정도 쭉 뻗는다.

"하나요!"

말 소리 끝에 매질하는 '딱!' 소리가 후렴구마냥 붙었다. 중곤으로 스무 대를 내려치고 나장들이 허리를 펴자 죄인의 엉덩이 살가죽이 터지고 너덜거려 선혈이 낭자했다. 이내 홍국영의 힐책이 떨어졌다.

"네 이놈! 공연히 억센 척 돼먹지 않은 의리를 내세워 입을 다문다면 그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육신이 멀쩡한 상태로 죽는 것보다 몸이 찢기길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 허나 명심해라. 설령 네놈이 죽는다 해도 나는 다시 살려내 혹형을 가할 것이다!"

다시 명이 떨어지고 압슬기(壓膝器)가 대령했다. 불화로 위엔 쇠젖가락이 오르고 압슬기가 제 모양을 갖추었다. 다소 시간이 걸린 것은 영조 대왕 때 얼토당토 않는 죄목에 압슬기가 자주 이용되자 정조가 복위한 후 모두 부숴버렸다. 그런 이유로 압슬기의 등대는 다소 늦어졌다. 죄인 앞에서 모든 게 꾸며지자 홍국영은 잠시 사이를 두고 죄인을 바라보았다.

"네가 불지 않는다 하여 실체가 가려지는 건 아니다. 조금 전 궁 안에서 너희와 내응했던 자들의 흔적이 발견됐다. 지금은 아니라 발뺌하나 불원간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네 놈의 시체라도 온전하려면 어서 불어라! 죽는 건 이미 정해진 것이나, 네놈의 몸뚱일 토막 쳐 이리들의 밥으로 넘기는 건 네가 할 나위다. 어떠냐, 말 하겠느냐?"

전흥문은 피곤한 낯을 들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눈길이 홍국영의 시선과 얼크러졌다.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한 두 사람의 시선은 전흥문이 고개 돌려 외면하며 이내 가라앉았다. 모든 게 귀찮고 시들해졌다. 이미 하반신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난장된 상태고, 설령 살아난다 해도 사내구실을 할 지는 의문이었다. 더구다나 자신의 원한에 의한 거사가 아니고 보니 더더욱 싫증 났다. 게다가 정조 임금의 자상한 목소리가 매를 맞으면서 되살아나 굳게 다문 다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죽을 거라면 속 시원히 털어놓고 훌훌 떠나버리자. 불에 달군 인두질이 시작하기 전 홍국영이 다시 소리쳤다.

"이놈아! 어찌 그리 몽매하고 미련하냐! 네 놈은 다른 자들의 말만 믿고 궁에 뛰어든 게 아니냐? 모든 걸 너 혼자 뒤집어쓰고 죽겠다는 건 알겠다. 허나 생각해 보아라!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함부로 손상하는 건 죄악이다. 너 하나 죽는 건 그렇다 쳐도 신체를 상하는 것은 부모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네 놈이 버틴다면 음식 받아 먹을 손까지 없어질 것이다!"
"내··· 몸의 형틀이나 벗겨주오···."

홍국영은 정색을 하고 나장들에게 명해 죄인의 몸에서 형틀을 벗겨주었다. 즐거운 도락을 놓친 나장들은 달갑잖은 낯으로 전흥문의 몸에서 물러났다.

"주모자는 누구냐?"
"홍술해요."
"그리고 또 누구냐?"
"나머진 홍술해에게 물어보시오."

"너는 무엇 때문에 궁에 들어왔느냐?"
"간당을 몰아내고 왕통을 바꾸려 했소."
"누구를 추대하려 했느냐?"
"은전군이오."
"무어, 은전군?"

홍국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단 죄인을 하옥한 뒤, 홍술해를 묶어오라는 명을 내리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홍술해(洪述海). 이 사람은 영조 35년(175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763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다녀와  이방좌(李邦佐) 병사의 탐학상을 보고 엄벌을 건의해 양양에 10년간 유배케 하였다. 그 후 1764년에 교리에서 승지로 승차돼 장연현안핵어사(長淵縣按覈御史)로서 민전(民田)을 강탈하고 이를 항의하는 백성들을 살해한 현감 이경춘(李景春)의 죄상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 후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외지에서 미곡을 사들이며 1만4천 냥을 도둑질해 제 뱃속을 채운 게 해서찰민은어사(海西察民隱御史) 임희우(任希雨)에게 적발돼 파직되었다.

두 해가 지난 정조 즉위년엔 한 해 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 장전(臟錢) 4만 냥과 조(租) 2천 5백석, 송목(松木) 260주(株)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 안치됐다. 이듬해 한양으로 돌아와 은밀히 귀양지에 있는 홍인한 · 정후겸 등과 결탁해 정조를 살해하고 은전군 이찬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워왔었다.

그가 흑산도에 위리 안치될 때, 전주 땅에 물러가 있던 아들 상범(相範)은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범궐의 대역죄를 저질렀다가 금부 나졸들에게 붙들러 왔다. 한쪽엔 피골이 상접한 전흥문이 무릎 꿇린 채였고 그 뒤쪽에 은전군이 사색이 돼 몸을 떨었다. 영상을 비롯해 좌상과 대사성이 자리 하고 도승지 홍국영이 상감을 대신해 치죄에 나섰다.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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