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이름은 崔英浩여서 초등학교 학적부에도 최영호로 되어 있고, 중학교까지도 출석을 부를 때 최영호로 불렀다. 3학년에 때 진학을 위하여 호적등본을 떼어 제출했더니 내 이름이 영호가 아니라 千浩로 되어 있다며 담임선생님이 '너는 학적도 없이 3년 공부한 놈이라'고 말씀하시며 학적을 정정해 주셨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큰형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고, 둘째는 해방둥이, 셋째는 6.25전쟁 통에 태어났으며, 나는 50년대 후반에 출생하였다. 그 당시에도 자식을 낳으면 출생신고라는 것을 해야 했을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라는 곳이 큰 권력을 가져 배우지 못한 촌부들이 발을 들여 놓기에는 문턱이 대단히 높아 집 안에 자식이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부모인 본인들이 직접 하는 일을 엄두도 못 내고, 대부분 동리 이장이 대신 해주었는데, 아버지도 자식을 여럿 낳고도 어여쁜 자식의 이름을 세상에 올리는 일을 위해 면사무소에 한 번도 가지 못하고 이장에게 부탁해야 했을 것인데, 그 때 이장의 권세도 대단해서 잘못보이면 장가 들어 자식을 낳은 사람도 일제징용으로 끌려가게 하는 세상이었으니 자식 출생신고를 할 때마다 보리쌀 몇 되라도 선물로 드려야 했을 것이다.
해방이 되어 세상이 바뀌어도 면사무소의 문턱은 낮아지지 않았고, 먹고살기도 힘에 부치는 세상에 자식들은 줄줄이 태어나고 어느 녀석은 몇 년 살다가 애비보다 먼저 세상을 따나는 힘에 겨운 때에 자식의 출생신고를 위하여 배를 타고, 그리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걸어서 면사무소까지 가는 것이 그리 수월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고 첫돌이 가까이 오는 어느 날 면사무소에 간다는 이장에게 아들 녀석의 출생신고를 부탁하고 이름까지 잘 알려 줬건만 면사무소에 도착한 이장은 내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려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 집 애들 이름이 '明浩, 長浩, 萬浩, 善浩'가 있고, 또 浩자 돌림이니, 千浩라고 이름을 짓자 생각하여 지어진 이름이 지금의 내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호적에 내 이름이 천호라고 올라있는 것도 모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6년을 다녀 졸업장도 최영호로 받았고, 대부분 어릴 때 친구들은 지금도 내 이름을 영호라고 부르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 동리에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몇 명 있어서 정작 우리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살아 왔고, 영호로 불리든 천호로 불리든 세상에 나는 하나밖에 없고, 그리고 잘살고 있지만 이제는 영호라고 불리는 것이 낯설어 남의 이름 같이 되어 버렸으니 천호가 내 이름이 된 듯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상의 가문과 과거의 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조소할만한 하찮고 비천한 집 안의 이야기지만 이 일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무시한일은 없었다. 자식의 이름은 부르기도 좋아야 하지만 부모의 소망이나 신념, 혹은 철학, 그리고 신앙 같은 것이 담겨져 있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소중하게 지어졌을 것인데, 나의 이름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장님이나 아니면 면서기의 머리에서 나온 듯 하여 씁쓸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의 위로를 받으며, 내 아들 녀석들은 출생한 뒤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내가 직접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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