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소재한 벽계강당. 벽계강당은 앞으로 흐르는 벽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벽계천은 용문산에서 발원을 한 물줄기가 50여 리를 서북간으로 흘러, 수입리 나루터에서 북한강과 합수가 되는데, 이 시냇물을 벽계천이라 부른다. 벽계강당은 벽계천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 벽계에 소재한다.
화서 생전의 설계대로 지어진 벽계강당
지금의 벽계강당은 생전에 화서 이항로(1792~1868)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에 지은 강당이다. 이항로의 후손들과 후학, 그리고 관이 함께 힘을 모아 1999년에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곳에 벽계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양헌수, 최익현, 김형묵, 유인석 등이 이곳에서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은 1833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양헌수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조선 순조 16년인 1816년에 태어났다.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능했다. 의암 유인석은 헌종 8년인 1842년에 태어난 의병장이다.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한 위정척사론자이다.
이러한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배웠으며, 그 장소가 바로 벽계강당이라고 한다. 그럼 점으로 보면 벽계강당은 지금의 모습 이전에 다른 모습으로 이미 이 자리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벽계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앞을 트고 주변을 방으로 둘렀다. 장대석의 기단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둥근 주추를 놓았다.
독립가옥으로의 가치를 지닌 대문채
벽계강당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은 솟을대문이다. 중앙에는 높다랗게 문을 올리고, 양편에 방을 들였다. 양편의 방은 같은 크기로 했으며, 강당쪽과 바깥쪽을 향해 문을 양편에 냈다. 굳이 대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벽계천 쪽으로 낸 방문만 열어도 시원한 바람이 들어올 듯하다. 창은 벽면 위편에 조그맣게 냈으며, 밑으로는 거북이를 닮은 굴뚝을 만들었다. 이항로의 설계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화서 선생은 설계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월 13일,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다. 사진을 찍는데도 손가락이 잘 펴지지를 않는다. 더구나 양평은 청정지역으로 주변의 지역보다 한결 춥다. 겨울이 되면 으레 주변보다 2~3도가 기온이 낮은 곳이다. 거기다가 벽계천에서 부는 바람까지 옷 속으로 파고든다. 눈이 가득한 마당을 들어서 대문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벽계천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보니 길 아래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이야 눈이 쌓여 볼 수가 없지만, 그 아름답다는 노산팔경이 저 아래 벽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못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으니 그 어찌 서글프다 하리오. 또 한 번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반갑기만 하다.
참으로 좋소, 이 강당이
장대석 기단위에 올린 벽계강당. 눈이 쌓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본다. 벽계강당은 중앙을 마루를 놓고, 삼면을 돌려 방을 들였다. 양편의 끝 방은 작게, 그리고 양편 안쪽의 방은 크게 들였다. 강당 마루 뒤편에 마련한 세 개의 방은 모두 같은 크기다. 아마 후학들이 이 강당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나름대로의 배움을 익히고는 했을 것이다. 방의 뒤편으로는 모두 아궁이를 내었다. 한 겨울에도 뜨듯하게 불을 때고, 학문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화서 선생의 배려였을 것이다.
벽계강당의 마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시원하다. 화서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강당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강학을 하고, 경계를 즐긴 곳이 있다. 지금은 쌓인 눈으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지만, 봄이 되면 이곳을 돌면서 평소의 선생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조그마한 구름이라도 보내서
맑은 빛을 얼룩지게 하지 말라
지극히 순수하고 또 명랑하여
태양의 짝이 되게 하라
노산팔경 중 제일경이라는 제월대에 정자로 22자의 명(銘)을 새겼다고 한다. 이렇게 여덟 곳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 바로 벽계강당이다. 강당 양편에 큰 방은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마루를 더 넓게 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막힌 것도 넓게 보라는, 선생의 가르침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이 쌓인 벽계강당 마루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깊은 상념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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