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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을 배울 때에는 오직 실천하는 것을 최선의 공부로 삼아야 한다."

 

<책에 미친 바보>(이덕무 지음/권정원 편역) 겉그림 일부. 미다스북스 펴냄
<책에 미친 바보>(이덕무 지음/권정원 편역)겉그림 일부. 미다스북스 펴냄 ⓒ 민종원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쯤에는 잘 했거나 못 했거나 제 길 잘만 가는 시간을 되짚어보고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깊은 새벽녘엔 아무도 몰래 마음 속 한 자락을 꺼내 매만진다. 해가 길 나설 채비를 서두르는 이른 아침이 되면 부족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내야 할 하루를 생각하며 다른 빛은 전혀 필요 없는 한낮에는 문득 수평선이나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루는 가고 하루는 온다. 그리고 그렇게 오가는 하루 사이사이에 내가 주로 하는 일이란, 진짜 모습을 다 보여주자면 부끄러운 일이겠으나, 대게는 여기저기 작은 동산을 이룬 책들을 바라보며 가끔은 한두 권씩 골라내어 읽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거짓말 한 백 번은 더 보태서라도 늘 하고픈 말은 '책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말이다. 책벌레라 해야 할지 아니면 스스로 말했듯이 '책에 미친 바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책이 아니고서는 하루해가 오가는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책을 옆에 끼고 사는 이덕무를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내 속내를 마냥 감출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책으로 산을 이룬 곳을 바라보는 일은 하루 세 끼 이상을 먹고 배불뚝이가 되는 일보다 백배는 더 좋다. 적어도 이것만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서 진심으로 고백한다.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 어른이 되고부터는 온갖 서적을 두루 읽었다. 늘 남에게 책을 빌려 보았는데, 남들 또한 아무리 몰래 감춰두는 귀한 책이라도 싫은 기색 없이 기꺼이 빌려주면서 말하기를, "이덕무, 자네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군" 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덕무가 책 빌리기를 부탁하기 전에 먼저 빌려 주면서, "책을 두고 자네의 눈을 거치지 않으면 그 책을 무엇에 쓰겠는가?" 했다. 그는 책을 베끼는 습관이 있어서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舟에서도 책을 보았다. 그래서 비록 집에는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 둔 거와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또한 수백 권이 되는데, 그 글씨가 모두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7-8쪽)

 

이덕무는 자타가 공인하는 간서치(看書痴)라고 한다. 이 세상에 둘 도 없는 '책에 미친 바보'가 바로 이덕무라는 말인데, 그는 박지원, 박제가 같은 다른 북학파 학자와 달리 책, 학문에서 생활과 실천이라는 측면을 더욱 강조한 인물이라고도 한다. 지금 여기에 이덕무가 있다면 어느 정도 농을 섞어 "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정도로 그는 책, 독서, 문학에 대한 사랑과 사상이 아주 뚜렷하고 강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약한 몸을 지녀서 욕심껏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니 그점은 내가 생각해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건 사실, 병치레는 잘 안 하면서도 아무래도 힘은 약한 내 모습이 슬쩍 눈앞을 스쳐가기 때문이기도 한다.

 

책은 연보, 인명·서명 해설, 원문 등을 담은 부록을 빼고 여섯 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첫 갈래에는 자기소개 글들이 담긴 셈이고, 두 번째 갈래에는 이덕무의 독서 습관 및 독서법에 대한 글들이 있다. 세 번째 갈래엔 학문에 대한 이덕무의 사상이 담긴 글들이 있고, 네 번째 갈래엔 벗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다. 다섯 번째 갈래엔 제목 그대로 군자와 선비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덕무의 소신을 밝힌 글들이 있고, 여섯 번째 갈래엔 자연을 벗 삼아 책에 파묻혀 사는 그의 소박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있다. 책머리엔 박지원이 쓴 '내가 본 이덕무'라는 글이 있다. 이것이 바로 허약한 체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책 읽기를 제 목숨보다 더 사랑했을 이덕무의 삶이 담긴 <책에 미친 바보>의 대략이다.

 

그는 책을 읽는 일을 삶의 전부로 여기며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누가 고매한 선비 아니랄까봐 '책만 우러러보는 멍청이'는 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삶이 없는 글이란 참 글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책에 빠져 산다.) 책 없는 삶을 삶이 아니라고 하면서 삶이 없는 책과 글 역시 제대로 된 책과 글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그의 충고 앞에서 조용히 숨을 고를 수밖에 없다.

 

"파산자坡山子가 문집을 가지고 와서 완산자完山子 이덕무에게 문집의 이름을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완산자는 3일 동안 생각한 끝에 진한 먹을 묻힌 몽땅 붓으로 문집 앞머리에 '효가잡고'라고 큼직하게 써주었다.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효'라 하고 효를 하고 남는 여가를 '가'라 하며 여력이 있어 시나 문장을 저술하여 서책에 기재한 것을 '잡고'라고 한다.

 

어찌 효를 하루라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장이라는 것은 효도를 하고 난 뒤에 남은 여가에 하는 일이다. 범이 아무리 아름다운 가죽을 가지고 있어도 을골乙骨이 없다면 어떻게 그의 위엄을 널리 전할 수 있으며, 용이 아무리 찬란한 비늘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의주가 없다면 어찌 그 신묘함을 펼칠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이면서 효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 있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그의 덕을 칭송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효를 닦아야 한다."(91-92쪽)

 

책의 벗은 이덕무요, 이덕무의 벗 역시 책

 

이덕무는 세상을 파헤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더 마음을 쓰는 꼼꼼하고 내성적이며 탐구자 자세를 지닌 사람이라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말문을 아예 닫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늘 자기 삶을 살살 어루만져 제 모습을 다지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한다. 별 것 아닌 작은 일들도 자세히 기록하고 그것을 친한 벗들과 나누는 삶을 즐거워했던 이덕무는 책, 자연, 벗, 그리고 하루에도 수없이 세상보다는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는 이덕무 자신만 있으면 만족했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사는 게 더 좋다고 평가하는 게 이덕무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싶을 정도로 그는 그저 자신을 '책과 이덕무'로 각인시킨다. 그의 글들을 옮기고 엮은 권정원은 아마도 이덕무가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서책에 대한 정보는 이덕무에게 문의하기를'이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시대에서든 '책 아니면 이덕무, 이덕무 아니면 책'라는 평가를 들었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였지만 그런 그 역시 늘 부족한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의심나는 일이나 의심나는 글자가 있으면, 즉시 유서類書나 자서字書를 자세히 참고하라"와 같은 투의 말들을 곳곳에 남기기도 했다. 읽고 곱씹는 만큼 그의 삶도 조심스러워지고 갈수록 깊어졌다는 안팎의 평가가 아무래도 사실인 듯하다.

 

책을 아낀 사람답게 자기 마음과 삶을 자세히 살피려 노력한,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세심했던 사람 이덕무. 벗이 없으면 책과 벗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그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솔직히 나도 책이 내 벗이고 나도 책의 벗이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부족한 내 모습을 보고도 누구나 나를 벗으로 여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책에 미친 바보'가 되고픈 내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될 것이다. 책이 없다면 구름과 노을이 내 벗이요, 구름과 노을이 없다면 하늘을 나는 갈매기에 내 마음을 맡기면 된다. 갈매기마저 없다면 남족 마을의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친해지면 될 것이고, 원추리 잎새 사이에 앉아 있는 귀뚜라미도 구경하며 좋아할 만하다. 내가 아끼더라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이 모두가 나의 좋은 벗이 될 수 있다."(118쪽)

덧붙이는 글 |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지음. 권정원 편역. 미다스북스, 2004.
* 이 서평은 제 블로그(blog.ohmynews.com/eddang)에도 싣습니다.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선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미다스북스(2004)


#책에 미친 바보#이덕무#권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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