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무는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고 이로움을 주며,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그것도 잘 가꾸어진 식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일을 평생동안 해 온 사람은 어떤 삶이었을까? 45년동안 하훼농장의 한 우물만 파온 김 명갑씨(69․수림 꽃 농원 대표)를 만나 보았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연속에서 살아온 지난날은 그런대로 행복했던 것 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물론 45년동안 이 일을 해 오면서 절망도 몇 번 겪어봤지만, 사람들에게 꽃과 나무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김씨는 현재 3000여 평의 아름답고 수려한 화훼농원을 운영하며, 흙 속에서 식물에게 정성과 사랑을 주듯, 세상 사람들에게도 여러 경로로 사랑을 나눠주며 살아왔다. 그의 삶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 나눔이다.
창원시 가음동 대로변에 위치한 수림 꽃 농원에 들어서면 각종 아름다운 관엽식물들로 가득차 마치 대형 수목원에 온 착각을 일으킨다. 이곳에는 군자란, 관음죽, 갠챠, 서황금, 도시로, 황금팬백, 고리쇠, 쟈스민, 단풍나무, 연산홍, 최고품질의 알로에, 다양한 정원수 등, 여러가지 관엽식물을 직접 재배하면서 저렴하고 품질 좋은 수목을 판매도 한다.
또한 국내외까지 꽃배달을 해주고 있다. 2003년에는 플라워라인 전국 연합회 최우수회원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의 상큼하고 독특한 향기와 분위기는 잠시나마 도심 속의 메마른 일상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이들을 동반해서 오면 식물 학습장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지금의 이 농원은 지난 45년 간 그의 아내와 그가 흘린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 꽃 재배 창시자들로부터 화훼재배법 전수 받아시골태생인 김씨는 지난 1966년 군 제대 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산시 양덕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절화(꽃을 꺽어서 꽃꽂이를 하는 꽃)재배 창시자들이었던, 김기억, 여대기, 배문수씨 등으로부터 약 1년 정도 화훼재배를 전수 받았다.
온갖 고생을 하며 어렵게 시작한 비닐하우스를 일궈가던 1969년. 그 시절에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경남 마산에서 꽃을 재배해서 서울로 보내졌다. 그해 여름. 폭우로 인해 마산의 한일합섬 일대가 침수되는 사태가 벌어져 대부분의 화훼농장이 물에 잠겼지만, 김씨의 농장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피해가 없어 꽃의 희소가치가 높았다. 그때는 대부분 전기로 불을 밝혀 개화시기를 늦추며 출하했지만, 그는 돈이 없어 무전조꽃(자연 그대로 재배하면서 수분과 비료를 많이 줌으로서 개화시기를 늦춤)을 재배했었다. 그때 쌀 1되가 50원 했었는데, 국화 한 송이는 45원까지 거래되었다.
홍수, 화재 등으로 막대한 손실 초래하기도그렇게 점차 하우스를 넓혀가며 1972년도부터는 창원에서 터를 잡았다. 창원이 개발도시로 선포되면서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인구 유입이 시작되면서 농원을 점차 넓혀갔고, 흙은 그의 성실과 땀과 눈물을 그대로 알아주었다. 손님들에게도 오직 정직, 신뢰, 성실로써 대하니 진실은 통했다. 그럴즈음 농원 운영에 제법 나름의 노하우도 생겨, 농고생들이 그의 농원에 실습을 나오기도 했다. 그 때의 제자들이 성공한 예도 있다.
80년대의 어느 겨울이었던가? 식물 보온 상 기름 드럼통으로 난로를 만들어 화목으로 불을 떼면서 난로 옆에 잠을 자다가 추우면 일어나 화목을 넣곤 했는데, 어느 순간 깊게 잠이 들어 난로과열로 화재가 발생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섰다. 2003년에는 태풍 매미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때 하우스 반파로 복구작업 때 자재, 인건비, 식물 피해액 등으로 약 8000만원정도 손해를 보았을 때, 정부에서 위로금으로 67만원을 받아 감사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사회 경기가 나쁠 때는 하훼를 사치품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그럴수록 하훼가 마음의 여유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봉사활동은 남몰래, 알려지는 것 원치 않아
그는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아와서인지 어려운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여러 곳에 도움을 주며 살아오고 있다. 창원 동보 보육원, 음성꽃동네, 산청 성심 인해원, 창원 기술센타 4H후원자, 마산 교도소 교화위원(정심회), 청광학교 등에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20년 정도 후원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며, 기사화되는 걸 만류했지만, 좋은 내용이라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기사에 넣었음) 이외에도 국제 로타리클럽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며 조금씩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기부한 것을 재산으로 모으고, 돈 버는 것에만 몰두했다면 지금쯤 큰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아오고 있고, 사는데 불편함이 없을 만큼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단다. 늘 즐거운 마음과 긍정적인 마음, 남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오니, 그것이 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누군가가 들었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험담이나 이간질은 아주 나쁜 사회악이라고 생각한단다. 서로가 감싸주고, 배려하며 산다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중퇴가 전부인 그는 못다 한 공부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경남대 경영대학원, 창원대 경영최고과정, 창원 박물대학을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