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매끈한 각선미로 무장한 어린 소녀들이 TV에 나와 우리들에게 감히 소원을 말해보라 노래했다. 그러한 그녀들 앞에서 자신의 판타지를 보았던 이시대의 남성들은 그녀들에게 거침없이 자신들의 은밀한 소원을 외치며 열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이 열망하는 소원 따위는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쩌면 소원을 말해 보라던 그녀들도 그들의 소원에는 관심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 다 괜찮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말한 소원을 그녀들이 실제로 이루어 주리라 생각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들은 계속해서 소원을 말해보라 했고, 팬들은 그녀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욕망의 허상에서 진실이란 놈은 TV브라운관에 앞에 꽉 막혀 있음을 그들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았다. 그것이 이 시대 아이돌 그룹이 존재하는 이유였고, 대중은 그 그들을 소비해 나가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는 것에 피차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다. 팬덤이란 원래가 자발적인 대중문화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훌륭한 대중문화의 콘텐츠는 사실 여기에서 출발한다. 바로 그들이 가지는 역할에 충실할 때다. 원초적이지만 액션영화는 화끈해야 되고 코미디 영화는 웃겨야 한다.
따라서 초기 일본의 '모닝구 무스메'와 곧잘 비교되던 '소녀시대'의 성공의 원인 역시 거기에서 출발하며, 이번에 나온 신보인 <Oh!>도 그러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음악시장의 독점적 행태에 대해 비난할 여지는 충분하지만, 이번 그녀들의 신보를 리뷰 하는 데에는 그 '역할'이란 것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 그녀들은 과연 이번에도 우리 입에서 'Gee'를 말하고 소원을 외치게 해줄 것인가.
그녀들의 역할, 그리고 'Gee'
그전에 그녀들이 우리 앞에 어떠한 존재감을 던졌던 곡은 1집인 <소녀시대>가 아닌, 첫 번째 EP인 <Gee>였다. 이 노래는 그 이전의 그녀들의 히트곡인 1집의 '다시 만난 세계'나 '키싱 유'처럼 어딘지 모르게 예전을 답습하거나, 일본의 그것을 모방하며 빙빙 돌아가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확실한 존재의 이유처럼 그 노래는 화려한 소리로써 단숨에 고점을 찍어 버리는 노래였다.
노래시작 몇 초 만에 울려 퍼지는 'Gee'의 향연은 대중들의 귀를 휘어잡아 그녀들이 '반짝반짝 눈이 부실'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을 만든 이트라이브(E-TRIBE)의 존재는 후에 그들이 직접 발매한 디지털 싱글인 <엄마>에 있지 않고, 소녀시대의 <Gee>에 살아있다고 말한 누군가의 이야기는 이제 반박하기 힘든 주장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Gee>는 단순한 아이돌 음악을 뛰어넘는 '팝 음악'으로서의 파괴력이 존재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소녀시대는 어느새 국내를 대표하는 걸 그룹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발매된 두 번째 EP인 <소원을 말해봐> 이후에 소녀시대의 정체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내면의 욕망을 욕망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축척되었다. 1집 <소녀시대> 때의 흰색의 풋풋한 감성, <Gee>에서의 형형색색의 스키니 진, <소원을 말해봐> 때의 마린 룩은 그녀들의 팬덤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확장되어진 것이다. 아이돌 그룹의 인기는 원래가 서서히 축척되다가 어느 한순간 소멸되는 것이 정해진 공식이라면, 그녀들은 현재 이렇게 팽창되고 있는 시점이다.
소녀시대의 정규 2집 <Oh!>
이러한 흥미로운 시점에 그녀들의 정규 2집에 관심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기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역시 <Gee>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따라서 SM 엔터테인먼트의 전속 작곡가인 '켄지(Kenzie)'와 팩토리 레이블의 수장이자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김형배의 합작품이자 타이틀곡인 'Oh!'는, 그래서 예전 'Gee'를 상당 부분 답습한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스키니 진에서 치어리더로 변화했을 뿐이다.
그녀들의 퍼포먼스와 가사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화했지만 신선함은 예전만 못한 것이다. 이러한 피동적인 모습은 그녀들의 이미지가 축척되는 지금의 과정에선 팬들에겐 일종의 클리셰가 될 뿐더러, 또 일부에서 지적되는 민망한 가사는 사실 자본과 구매만을 욕망하는 것만 같아 뒷맛이 별로다. 아마 이번 타이틀이 호불호가 갈린다면, 아마 이 부분 때문이리라.
물론, 그럼에도 'Oh!'는 분명 청자를 흡입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힘은 음악자체를 벗어난 소녀시대라는 타이틀이 가진 힘일 것이다. 아직 그녀들의 영향력은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이렇게나 강력하다.
그 외에 곡에서는 예상하다시피 화려한 메이저 지향의 댄스튠이 음반에 전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일렉트로니카의 그것을 차용하면서도, 그녀들의 목소리를 묻는 보코더가 없다는 것은 특이하다. 아마도 9명이나 되는 캐릭터를 기계의 소리에 몰입하는 것은 스스로 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이 음반에 두 번째 트랙인 'Show! Show! Show!'의 강렬함은 거부하기 힘든 상당히 매력적인 곡이다. 따지고 보면 'Oh!'보다 더 청자의 욕망을 건드리는 곡이지만, 뒤에서 울리는 사운드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그저 빠져들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Oh!' 이후에 주목받고 사랑받아야 할 곡이 있다면 단연 이 'Show! Show! Show!'다.
아울러 소녀시대의 보컬의 매력을 한껏 뽐내는 발라드 곡인 '영원히 너와 꿈꾸고 싶다(Forever)'나 '별별별(☆★☆)'같은 곡들도 꽤 훌륭하다. 곡 자체의 완성도에 큰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댄스 그룹이기 때문에 묻혀 버리는 그녀들의 보컬로서의 자질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특히 솔직한 가사로 고백하듯 노래하는 이트라이브의 '별별별'은 단순히 피아노와 몇 개의 현악으로만 곡을 구성하고 나머지는 그녀들의 보컬로 꽉 채워진 괜찮은 곡이다.
특히 소녀시대의 리더이자 보컬로서의 자질이 가장 잘 검증된 태연과, 지난 여름 음원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냉면'이라는 곡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완전히 각인시켰던 제시카의 목소리에 좀 더 주목하자. 이 둘의 목소리를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와 함께 흘려버리기엔 확실히 아깝다.
그 외에 보사노바 풍의 미디엄템포의 '카라멜 커피(Talk To Me)'ㅡ이 곡에서도 제시카의 음성은 마치 이곡이 그녀의 솔로곡인 것 마냥 상당히 귀에 잘 들어오는데,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 앞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소녀시대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뮤지션들과 장르에게 차용되지 않을까 예상한다ㅡ, 예전 90년대 아이돌들의 퓨전 팝에서 울리던 유려한 멜로디 라인을 연상하는 깔끔한 사운드가 인상적인 '좋은 일만 생각하기(Day By Day)'ㅡ참고로 이곡의 작곡자는 '슈퍼주니어'의 '샤이닝 스타'에 이어, SM 아이돌들의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는 것이 이젠 익숙해져 버린 '푸른 하늘'의 유영석이다ㅡ. 그리고 '별별별'에 이은 이트라이브의 '웃자(Be Happy)' 같은 댄스곡 역시 이들의 2집에서 주목할 곡들이다.
그 외에도 과거 히트곡인 '키싱 유'를 상당히 닮아있으면서도, 보케리니(Luigi Boccherini)의 미뉴에트를 가야금 버전으로 샘플링하여 변화를 준 '뻔&Fun(Sweet Talking Baby)', 역시 같은 소속사인 샤이니의 '키(Key)'가 피처링한 '화성인 바이러스' 같은 곡들도 조금은 뻔한 곡이긴 하지만 이들의 매력을 살려내는 데에 크게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맨 끝인 열한 번째, 열두 번째 트랙은 그들의 EP에 실린 히트곡인 'Gee'와 '소원을 말해봐'로 2집인 <Oh!>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녀들은 진화한다! 다만, 모델이 바뀔 뿐
이처럼 소녀시대 2집 <Oh!>는 1집과 그 이전 EP음반들을 넘어서는 그녀들의 최고의 작품이라 말하기엔 힘들지 모르지만, 현재 이미지를 축척하고 능력을 팽창해나고 있는 그녀들의 현 시점에선 꽤 충분한 음반이다. 하지만 역시 국내를 대표하는 걸 그룹인 만큼 음악적 완성도와 맞물린 실험적 구성을 기대했던 팬이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서두에 말했듯 그녀들과 SM은 그들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2집 <Oh!>는 여실히 나타낸다. 또한 국내 아이돌 그룹들의 음악적 퀄리티와 팬덤을 유발하는 노하우는, SM 그들의 작품이자 국내 아이돌 1세대라 불리는 'H.O.T'와 'S.E.S' 이후 꾸준히 성장해 왔다는 것도 이 음반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즉, 아이돌들의 상업적 소비라는 것은 마치 휴대폰의 최신 기종과 같이 '모델'들은 바뀌지만 그 기술은 계속해서 진보되고 있음을 이 <Oh!>는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기대했던 그녀들의 음악과 모습은 이정도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것에 부합하지 못하는 그 어느 순간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것도 그들과 우리들의 운명이니, 크게 욕심 부릴 필요는 없다. 물론 그 긴 시간동안에 나 역시 그녀들을 응원하고 그녀들의 음악을 틈나는 대로 흥얼거릴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