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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곳에 있는가?"
"삼화루에서 시주한다고 연락해 이틀 전 내려왔답니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용인 관아에 들려 달라고 소인이 부탁드렸지요. 내일쯤엔 들르실 겁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서리배가 물러가자 정약용은 홀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미 뼛조각만 남은 최 참판 댁 며느리 몸에서 나온 검고 퇴색한 물건에 집중했다. 침(針)이 분명한데 한의원이 쓰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점쟁이들이 쓰는 산가지(筮)인가를 살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형편없이 부서진 쥘부채를 들자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찢기고 부러진 부챗살 때문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봐야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자 다시 검시기록을 펼쳤다.

이곳에 당도한 후 몇 번씩 보았던 내용이다. 스스로 목매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오의원이 윤씨를 살해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데, 무슨 방법으로 그녀를 단잠에 떨어지게 했을까.

더구나 자시(子時) 이전엔 잠을 자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런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면 공모자가 있어야만 윤씨가 혼절된 상태에서 목을 매달 수 있었다. 심증이 가는 건 시어머니 장씨(張氏)지만 증거가 없고 심증뿐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윤씨를 절명시킨 '침'과 '혼절시킨 물건'을 찾는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그것을 유추해가는 생각이라는 것. 어떤 땐 아귀가 맞아떨어지듯 풀리다가도 실타래처럼 엉클어지면 어느새 뇌리 곳곳에 숨어버린다. 그게 문제였다.

'가만···. 며느리 윤씨가 하수오(何首烏)를 처방한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걸 윤씨가 사용하려 했다면 분명 약재가 남았을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는 집안 식구들의 증언도 있었다. 당사자가 약재를 다른 곳에 쓰려 했다면 그는 누군가. 오라빈가?'

생각은 끝을 모르고 달리는 데 잡히는 건 없었다. 그야말로 빈주먹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허상에서 빠져나오며 정약용은 또다시 생각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밤이 깊어질수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게 정약용뿐이겠는가. 최 참판 댁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채엔 재취를 맞아들이지 않은 최석원이 밤 깊도록 책을 읽는 것 같았고 노마님도 서안 위에 한쪽 팔을 고인 채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장씨는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을 달렸다. 아들이 부아악 암자로 과시준비를 위해 떠난 후 며느리에게 아들의 보약을 준비시켰다. 삼봉산 아래 5백석지기 옥답을 아들에게 준 것은 중앙정부에 돈을 쓰기 위해서라는 다급한 말을 들은 뒤였다.

"어머니,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변해야지요. 냇가에서 땅을 파면 물이 나오겠지요. 그 물에 무엇이 섞이든 물이 나오는 것으로 다들 믿겠지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집안을 일으킨다는 아들의 청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손을 써뒀으니 요직에 나가는 건 과거에 합격해야 가능했다. 아들은 장가 들어 우선 안정을 취했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며느리에게 탕제를 준비시켰다.

"산중에 있다 보면 먹는 게 부실할 것이다. 그러니 몸은 그 얼마나 허하랴. 얘야, 집안을 출입하는 오의원에게 좋은 약재를 준비시켜라."

그렇게 하여 준비한 게 하수오(何首烏)였다. 이 날 탕약을 들고 집을 찾은 오의원은 문안 인사차 내당에 들렸다.

"마님, 이 하수오는 중국에서 들어와 오랫동안 재배된 것으로 덩이뿌리를 약재로 사용합니다. 자양 · 강정에 더없이 귀한 약입니다만 그 외에 경혈의 흐름을 고르게 하고 피를 맑게 하는 효험이 있습니다. 아드님이 드셔도 무방합니다만 혼인한 지 석 달이니 다른 약재를 쓰는 게 좋을 것입니다."

가져온 보퉁이 안에서 처음 보는 물건을 끄집어냈다. 동글동글한 옥가락지 모양의 반지(環)를 비롯해 용봉이 조각된 붉고 노란 황촉(黃燭), 물소뿔로 만들었다는 남정네의 양경을 본뜬 물건 등이었다. 마음으로야 이 무슨 해괴한 것이냐고 내쳐야 했는데 장씨의 얼굴은 발그레 달아오르고 호흡조절이 어려워 잔기침으로 감추었다.

"흐음, 큼 큼!"

달포 전, 오의원이 이 집에 들러 신혈로 고생한다는 장씨를 만났을 때 한 자루의 향촉을 선물로 준적이 있었다. 한 눈에 값 나가는 물건으로 보일만큼 섬세한 조각이 아름다웠다. 아들의 탕약을 준비하는 의원의 선물이니 그만큼 정겨운 배려가 녹아 있어 하수오를 가져온 날 선물로 받은 황촉에 불을 밝혔다.

"오의원이 권하는 약재는 어떤 것이오?"

"아드님께선 한창땝니다. 당연히 그에 맞는 약재를 써야겠지요. 혼인한 지 석 달이니 오즉 밤이 짧겠습니까. 지금은 짧은 밤에 소용되는 약재가 그만 아니겠습니까."

오의원은 타들어가는 황촉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시 한 마디 얹었다.

"사실 약재가 소용되는 건 마님이십니다. 사람의 정혈(精血)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데 마님께선 그것을 몸 안에 억지로 가두셨습니다."

장씨가 아들을 잉태했을 무렵 정적의 모함으로 남편이 죽은 후 지금까지 독수공방해왔다. 젊은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깊은 밤 사내 생각이 날 때면 바늘 끝으로 그 얼마나 허벅지를 찌르며 더운 피를 식혔던가.

고행의 나날이었다. 이제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차가운 피가 조금씩 덥혀지는 것을 아는 지 오의원의 말이 은밀해졌다.

"남편을 일찍 사별한 대갓집 마나님들은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이런 물건을 머리맡에 두고 계십니다. 각선생이란 것이지요. 육신의 허기를 달래며 스스로 부정한 짓을 피하려 했지만 사내 몸과 같을 수는 없지요."

장씨의 낯은 홍당무처럼 벌게져버렸다. 그 틈을 노려 오의원이 장씨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마님, 소인이 진맥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보료 위에 반듯이 누우십시오."

장씨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곳 저 곳 오의원의 손끝이 달리는 곳에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아 아련한 쾌감에 빠져들었다. 시원한 물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뜨거워졌고 호흡은 다스리지 못할 만큼 가빠왔다. 쉰이 다 된 자신의 몸에 그렇듯 불을 지필 수 있는 화등잔이 있는 줄 몰랐다. 처음엔 초롱불처럼 미미하더니 조금씩 심지를 돋우어 번져나가 급기야 온 몸을 덮어버렸다.

누가 먼저고 나중이 없었다. 무작정 사내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 속에 밀어 넣었다. 여자 나이 마흔 아홉이면 경도가 끊겨 구실을 할 수 없다지만 그게 아니었다.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정념은 온 몸이 부서질 듯 사내 몸을 끌어당겼다. 자신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사내의 힘을 자신의 내부에 가둔 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죄며 끌어안고 날 새도록 사분질쳤다.

정신이 든 건 아침상을 든 며느리의 목소릴 듣고 나서였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오의원은 언제 돌아갔는지 구겨진 요와 이불자락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아침상입니다."

장씨는 정신이 들었다. 얼른 거울 앞으로 가서 얼굴을 비쳐 보았다. 피곤기가 눈에 띄웠지만 두 뺨은 도화색처럼 붉었고 그 위에 미소가 머물렀다. 자신의 몸 어디에 그런 정열이 남아 있을까. 찾아내지 못한 기쁨의 반조를 어렴픗 느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조반 생각 없으니 상을 들일건 없다. 것보다 네 남편이 어찌 지내는 지 가봐야질 않느냐. 오늘이라도 공덕암에 다녀오너라. 가서 아범에게 일간 다니러 오라 해라. 의원 말이 아범을 직접 진맥해야 효험이 크다지 않느냐."

며느리 윤씨가 공덕암으로 떠난 후 오의원이 찾아왔다. 역시 지난 밤처럼 황촉을 밝히고 가볍게 분칠해 얼굴을 매만진 후 머리맡에 준비한 술상을 앞으로 당겼다.

한 병에 쌀이 한 섬이라는 '미인주(美人酒)'였다. 열여섯 나이의 처녀에게 생쌀을 씹게 해 항아리에 뱉은 후 그것을 삭혀 만든 일등주였다. 혀끝에 착착 감기는 술맛을 음미하며 오의원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마님께서 아시고 계시겠지만 중국엔 술을 좋아하는 여황제가 있었지요. 이 분은 40년 이상을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했습니다만,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자양 · 강정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피부를 어린 처녀들처럼 매끄럽게 가꿔 항상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즐긴 게 무후주(武后酒)였답니다."

무후주는 어린 새우를 독한 술로 기절시킨 후 그것을 하나씩 꺼내 음미하듯 먹는 묘미가 있다. 자양 · 강정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할 정도로 오의원은 미인주 한 잔으로 깔깔한 입안을 헹구고 나서 목소릴 깔았다.

"시생이 마님을 위해 은밀한 놀이를 준비했습니다."

이날 장씨를 들뜨게 한 것은 낙양의 한량들이 미인을 얻은 첫날밤에 사용한다는 유엽주(柳葉酒) 놀이였다. 미인의 몸에 술을 뿌리고 혀끝으로 빨아들이는 이 놀이는 어느새 조선으로 건너와 행세께나 하는 한량들의 하룻밤 놀이로 자릴 잡았다. 30여년 만에 사내의 몸을 접하는 장씨에게는 이런 놀이가 주는 감흥이 남달랐다. 완전한 별세계에 들어온 듯한 장씨로선 어떻게든 오의원의 환심을 사둘 필요가 있었다. 돌아가는 오의원에게 건넨 건 개성상인에게서 받은 백미 50석에 해당하는 어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관아를 찾아온 수명 스님은 예기치 않은 말을 꺼냈다. 세속 명리에 물들지 않은 탓에 재물은 들풀과 다름없으니 청정심을 기르라고 훈육할 만큼 몸과 마음은 때 묻은 명예를 벗어나 있었다. 그런 스님이 부서진 부채를 보며 반가워했다.

"이건 최선비 내자에게 제가 준 것입니다."

형편없이 망가졌지만 자신이 만든 물건이니 모양새만 보고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부채를 만지작거리던 스님은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토를 달았다.

"세 해전이었어요. 최선비 내자가 공덕암을 찾아와 이틀을 묵었는데 둘째 날 차를 마시던 중 문득 부채를 만들어주고 싶어 물었지요. 부인이 소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를요. 그랬더니 부인께선 '서방님이 과시에 장원급제하고 집안이 불길처럼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시어머님이 오래 오래 사셔야 하구요'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두 개의 부채를 만들어 백낙천의 '장한가' 한 구절씩을 적었습니다."

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하늘에 있어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 있어서는 연리지가 되리라'는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位連理枝)'였다.

"한데, 부채를 만들었으나 부인께선 그것을 가져가지 못했어요. 깜빡 잊고 간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최선비에게 산을 내려가 부인도 만나고 어머니가 준비한 탕약도 가져오라고 했어요. 산에서 자란 약초는 청정한 것이니 산에 있는 내가 끓여야 약재가 좋아 한다고 했지요."

정약용의 물음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추리, 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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