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 태어난 한 프랑스 작가가 있다. 1945년에 사망한 그는 "평생 세상의 경쟁에서 탈락한 밑바닥 인생들의 남루하고도 소소한 일상에 주목한 작가"이다. 이 책 <내 친구-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나이>(호루스 펴냄, 2007)을 쓴 작가의 이름은 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이다.
빅토르 바통. 석 달에 한 번 300프랑의 연금을 받고 사는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한쪽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그는 "습기로 얼룩진 벽지 여기저기에 공기가 들어가 들떠있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데 "비라도 내리면 방 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워져서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온기 없는 싸늘함은 방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꾸물꾸물한 배경 아래 살아가는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여간해선 온기를 느끼지 못한다. 모든 이들이 항상 자신을 비껴본다고 지레 짐작하며 언제든 미리 미리 그들을 경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정반대로 너무할 정도로 예의를 갖춘다. 그는 친구가 절실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친구를 찾지 못한다.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뤼시 뒤누아, 앙리 비야르, 느뵈, 라카즈, 블랑셰, 적잖이 많은 이들이 '친구'가 될 가능성을 안고 빅토르의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에게 영원한 친구, 진짜 친구로 남기 어렵다. 사람을 만날 때는 물론이고 혼자 있을 때에도 기억 속에 남은 모든 이들의 속마음을 이리저리 꿰맞추기에 바쁘다보니 그는 굳이 하루를 일찍 시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피곤한 하루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는다. 세상 눈치 보기에 바쁜 그는 자신의 가치를 따져볼 틈이 없다.
"진심으로 우정을 베풀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한없이 친절해질 수 있다. 연금도 침대도 독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상대방을 거역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약국에서 우연히 만난 앙리 비야르라는 남자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주고받고 맥주도 한 잔씩 같이 마신 빅토르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약속을 한다. 중요한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만나서 잠시 자리를 함께 했을 뿐인데 빅토르는 만남만큼이나 이별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흘겨볼거라고 걱정하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만난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미리 미리 걱정한다. 친구 없는 빅토르 마음은 바쁘다.
"나는 좀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과, 그의 주소도 모른 채 기약도 없이 헤어진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몇 시간이고 우울해져 죽음이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보통은 죽음에 대해 곧 잊어버리지만, 누군가와 기약 없이 헤어진다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나는 외톨이로 살다가 이대로 죽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3월 어느 날 오후, 강가로 나간 빅토르는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본다. 그는 "자살 같은 걸 할 생각이 없"으며 "다만 누군가에게 동정받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느뵈라는 사람이 뜬금없이 자살할 생각이냐고 그에게 묻는다. 정작 자살할 생각을 한 사람은 느뵈였고 빅토르는 엉뚱하게도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을 느뵈에게 하게 된다. 미래를 생각하라고,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고. 사람을 살리게 된 빅토르는 잠시 외로움을 잊고 그에게 집중한다.
새벽녘에 역에 나간 빅토르는 멍하니 서 있다가 얼떨결에 한 신사의 짐을 들게 된다. 그 신사가 빅토르를 짐꾼으로 여기며 대뜸 자기 짐을 들라고 지시했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하고 불쾌해했다. 하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처음 불렀을 때처럼 자기 맘대로 수고비를 쥐어주려 했을 때에도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짐 들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고 돈도 받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니까.
몸이 온전치 못한 빅토르는 사람들 주변을 겉돌며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겉돈다. 누구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그만큼 외로움과 걱정은 커간다.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가 되지만 그럴수록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미리 미리 걱정하다가 엉뚱하게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강한 사람은 외로워도 고독하지 않다"고 말하는 빅토르 바통은 여전히 진짜 친구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는 사람들 주변을 거닐 뿐 사람들 틈 사이에서 지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주변을 거닐 뿐 자기 마음 한복판에 자리 잡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든 안 만나든 계속 주변인으로 살아간다.
그렇다, 빅토르 바통은 주변인이다. 주변인인 빅토르는 지레 짐작하는 데 일가견이 있지만 현실과 제대로 연결 짓지 못한다. 세상이 자신을 흘겨본다고 느끼는 만큼 자신도 어느새 세상을 흘겨본다. 그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세상의 잘못일까. 끝끝내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빅토르 바통을 보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빅토르 덕택에 그가 보는 세상을 더욱 깊이 마음에 담게 된다. 빅토르 바통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주변에서 중심을 보게 한다. 철저히 주변인의 눈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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