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떨어진 저녁나절, 아기를 안고 걸리며 골목마실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경축! 인천광역시 (건축, 경관, 교통, 문화재) 심의통과!"라는 글월이 적힌 걸개천을 곳곳에서 봅니다. 온 나라 구석구석 이루어지는 여느 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정비'와 '도시정화'라는 이름이 붙은 인천 재개발을 걱정없이 할 수 있다면서 축하하는 걸개천입니다. 네 가지 심의를 통과하기란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참 오래 걸리는 일이라 하는데, 이제 이 심의가 다 끝났으니 재개발은 척척 이루어지겠지요.
그런데 네 가지 심의 가운데 넷째 대목인 '문화재'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문화재란 무엇을 두고 문화재라고 하는가요. 국어사전을 뒤적여 보면, "(1) 문화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 가치가 뛰어난 사물 (2) 문화재 보호법이 보호의 대상으로 정한 유형 문화재, 무형 문화재, 민속 문화재, 천연기념물, 사적, 명승지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나오는데, 우리들이 보기에 무엇이 (1)에 들 만한 문화재요, (2)에 들 만한 문화재인가요. 내 고향 인천에는 무슨 문화재가 있다고 할 만할까요.
엊그제 골목마실을 하다가 "昭和十五年五月二十日……"이라는 글월이 새겨진 빗돌 하나가 동네 계단으로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늘 지나다니는 골목길이요 샛골목을 잇는 섬돌이 퍽 예쁘장하구나 싶어 사진으로 담았는데, 집에 와서 원본파일을 죽 살펴보다가 이 글월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1940년에 무엇무엇을 했다는 이야기를 적은 저 빗돌은 언제 어떻게 골목동네 샛골목 계단 받침으로 쓰였을까요? 어디에서 뒹굴다가 이 골목 저 귀퉁이에 떡하니 얹혔을까요?
인천에서 문화해설사 일을 하고 있는 장회숙 선생님한테 말씀을 여쭈며 이 골목으로 다시 찾아와 봅니다. 문화해설사 장회숙 선생님은 이런 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세운 절(아마도 '신사'일 테지요)에서 쓰던 돌일 텐데, 해방 뒤 한국전쟁 때 폭탄 맞고 부서진 절에서 흩어진 조각들을 동네사람들이 가져다가 쓰면서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신사를 때려부수었다'면 그때부터 이렇게 굴러와서 박힌 돌인 셈이고, 한국전쟁 때 미군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을 하며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에 부서진 절에서 뒹굴던 돌을 전쟁이 끝난 다음 동네를 새로 짓고 고칠 때에 동네사람들이 하나둘 주워 와서 쓴 셈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 골목마실을 할 때에 섬돌과 주춧돌을 곰곰이 살펴봅니다. 곰곰이 살펴보니 그동안 '저 돌은 그냥 시멘트나 여느 돌은 아니네'하고 느끼던 돌이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일본 절에서 쓰던 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삶터에 아픈 생채기를 굵직하게 남긴 일본사람 발자취가 이렇게 골목집마다 구석구석 되쓰이면서 '눈에 거의 안 뜨이는 자리'에서 말없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돌들은 '문화재'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인천 중구 중국인거리 둘레는 '개항 역사를 말하는 문화거리'로 지정되어 옛 일본집을 허물지 않을 뿐더러 새옷을 입히거나 손질을 하지만, 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전쟁 끄트머리에 동네를 되살리면서 흘린 땀방울이 서린 발자취들은 그냥 '재개발 대상'이요, '재개발 확정 경축'이라는 외침말에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그만인 낡은 모습이라고 합니다.
고작 '일흔 살밖에 안 된' '일제강점기 자취' 하나야 밟아 없애건 까부수어 없애건 그리 큰일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동네 분들 가운데 이런 발자취를 헤아리는 분은 없다시피 하고, 이런 발자취 이야기를 꺼내며 "동네 골목이 참 예뻐요" 하고 말씀을 드려도 "이런 지저분한 동네인데 뭐, 곧 다 철거될 텐데" 하면서 스스로를 그예 낮추기만 합니다. 1940년에 일본 절에서 쓰던 빗돌 사진을 다시 찍으러 혼자 이 골목에 찾아와서 바지런히 사진기 단추를 누르니 동네 아주머니가 여쭙니다. "뭘 그리 찍어요?" "이 골목이 예뻐서요." "더러운 모습 찍는 건 아니고?" "……."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