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릴판 명찰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60~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에게 아련히 남아있는 이른바 '오바로크' 명찰. 최근 학생들 교복에 다시 '오바로크' 자수를 한 명찰을 달게 하자고 하면서 학생인권 침해 논란을 야기하지만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운동장은 군 연병장과 다름없고, 운동장에 서있는 구령대는 연병장 사열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학교에서는 학생들 두발 문제가 시끄럽고, 명찰은 여전히 학생들이 기피하는 대상 중 하나다.
학교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교 현실이 지금도 그렇다는 얘기고, 앞선 시대인 군사독재 시절에는 더 했다는 것일 뿐. 그리고 그 시절 학교를 다녔던 이들이 간직하는 추억 중 하나가 바로 '오바로크' 명찰인데, 잘 좀 박아달라고 재봉사를 졸랐던 이들이 이젠 아저씨가 돼 체육사로 바뀐 재봉사 아저씨의 가게를 지금도 찾아와 오바로크를 해달라고 한다.
"오바로크로 호랑이와 독수리는 기본" 오바로크는 바느질 기법 중 하나로 휘갑치기에 해당한다. 재봉틀로 하는 바느질이기 때문에 박음질 휘갑치기라고 해두는 것이 적당하겠다. 박음질은 재봉틀로 하는 바느질을 일컫기 때문이다.
산곡동에서 만물체육사를 운영하는 여인찬(57)씨는 오바로크 바느질 자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이제 부평에서 몇 안 남은 재봉사다. 지금은 오바로크 일보다 각종 운동기구와 운동복을 취급하는 비중이 많아져 그의 자수 기술은 다소 녹슬기도 했지만, '미싱'은 오늘도 돌아간다.
"산곡동 일대에 군부대가 많았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공수부대, 포병부대 등 여러 군부대가 많았다. 부평에 지금은 여기를 포함해 3곳 정도 남은 것 같은데, 그 때는 우리 가게 옆에만 3곳이 있을 정도로 오바로크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인뿐만 아니라 학생, 공장의 노동자들이 주된 오바로크 단골이었다."당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천에 올라온 여씨는 공부와 기술을 동시에 익혀야했다. 그래서 그가 배운 일이 바로 재봉기술이다. 80년 산곡동 현 가게 터에 가게를 내기 전까지 그는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 옛 정문 근처에 있는 오바로크 전문점에서 일했다.
가게를 내서 운영하는 세월은 30년이지만, 그의 바느질은 40년도 더 됐다. 부평으로 오기 전 서울 이태원 근처에서도 일을 했고, 군에 다녀온 후 부평에 정착했다.
여씨는 "70년대 노동자 월급이 2만 원 내외였다. 바느질 기술은 배우기가 고돼서 그렇지 기술이 있으면 인정받았다. 당시 이태원에서 일할 때 6만 원 내외를 받았고, 부평에 와서도 3만 원 내외를 받았으니 괜찮은 셈이었다"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이 고된 데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과 한국 군인을 상대로 가장 인기 있었던 여씨의 오바로크 작품은 독수리와 호랑이였다고 한다. 그는 "군인 잠바(=점퍼) 등 뒤에 백호나 흰 독수리를 새기고자 하는 군인들이 줄을 섰다"며 "사실 계급장이나 공수훈련 표시를 오바로크 치는 일이 가장 많았지만 사실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예술적 경지는 그림에 있었던 게 아니겠냐?"고 웃으며 당시를 전했다.
"1㎠ 안에 20획 한자를 새길 수 있어야" 80년에 가게 '만물체육사'를 어렵사리 낸 여인찬씨는 군에 있을 때 펜팔로 알고 지내던 지금의 아내 김윤자씨(51)를 만나 결혼했다. 가게가 곧 살림집이고, 집이 곧 가게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부평미군기지는 일제 때 일본군이 조병창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당시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조병창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곳이 이른바 산곡동 '사택'인데, 그 사택이 시작되는 첫 번째 집이 '만물체육사'다.
시작할 때 20평 남짓했던 공간은 확대됐고, 하는 일도 체육사의 비중이 커졌다. 30년 세월을 같이 한 부부는 지금, 남편 여씨가 종종 아내에게 오바로크 자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전수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아내 김씨는 "아직 초보단계다. 그래서 기초적인 이름을 새기는 것 외에는 그림이나 한자를 새기는 것은 엄두를 못 내고 있다"며 "남편 같은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단 남편도 바쁠 때면 기본적인 것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 배워두면 요긴하게 쓸 때가 많다"고 했다.
남편 여씨는 자신도 지금은 잘 안 될 것 같다며 솜씨를 보여줬다. 그는 "맨 처음 배울 때 영문부터 배웠다. 사실 그림보다 글자가 더 어려운 법이다. 영문이 더 쉬워 영문부터 배웠고, 그다음 한글, 한문 순으로 배웠다"며 "1㎠ 크기 안에 20획 한자를 새길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림은 나중에 배웠는데, 당연히 연습해야 했고 어느 정도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내는 그리는 감각보단 보는 감각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군부대와 공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의 가게에는 군복과 노동자의 단체복 등이 점차 줄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학생들 명찰과 체육용품이 대신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진 못했다.
여씨는 "오바로크와 더불어 군복을 수선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일도 줄고, 공장이 사라지면서 노동자들의 단체복에 회사명을 새기는 작업도 점차 줄었다"며 "명찰도 90년대 들어서면서 아크릴판으로 바뀌고, 학교에서 운동하는 학생들도 줄어들면서 그 분야 일감이 줄었다"고 말했다.
"세월 따라 변하지만, 산곡동 사람들 있어 감사" 학교 입학철이 되면 가게는 늘 붐볐다. 다들 명찰을 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학생들 교복을 수거해 여씨 가게에 가져다주면 여씨는 기일 안에 새겨서 건네야 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만물체육사는 오바로크 전문점에서 체육사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체육사 용품도, 가게를 찾는 사람도 세월 따라 변했다. 산곡동에서 제일 오래된 산곡초등학교만 해도 운동부가 많았다. 농구·축구·씨름·배구·핸드볼·탁구·등 많은 운동부가 있었고, 만물체육사는 이 운동부 학생들에게 단체복을 공급했다.
여씨는 "지금은 이마저도 없다. 다들 공부하느라 바쁘다. 학교 끝나면 바로 또 학원 가야 하는 학생들에게 놀 틈이 없다. 가게 매출이 떨어진 게 아쉬운 게 아니다. 우리가 엄혹한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요즘 학생들을 보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며 "아무튼 그때 운동부도 참 많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커서 가게를 찾을 때면 반갑기 그지 없다"고 했다.
체육사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여러 체육동호회와 생활체육 저변의 확대가 역할을 했다. 여씨가 오바로크를 칠 때만 해도 체육복이 따로 없었다. 동호회 활동이 있다고 해도 단체복을 맞추는 일은 빠듯한 살림살이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씨는 "운동화 마련도 어려운 때 체육복이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흰 티를 가져오면 거기에 다른 색으로 등번호를 매겨주곤 했다. 최소한 상대팀과 구분은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하곤 했다. 그 사람들이 인연이 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프로야구 덕에 8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야구용품이었다. 그런 뒤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현정화 선수 등… 탁구 흥행에 힘입어 한동안 탁구용품이 시대를 풍미했고, 90년대 들어서면서는 농구, 월드컵을 전후해서는 당연히 축구가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용대 선수 탓인지 배드민턴 용품이 붐을 이룬다고 했다.
여씨는 산곡동에서 오랫동안 학생들과 주민들을 상대한 터라 애정도 남다르다. 그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부평에 논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곳곳의 논이 천연 스케이트장이었다. 그 때 가게에 와서 스케이트 사갔던 학생들이 이젠 이 동네 저 동네 40대 아저씨들이 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세월이 변해 인심도 팍팍해졌지만 산곡동은 그래도 사람 냄새가 남아 있는 곳이다. 사실 산곡동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와 우리 가게가 있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니 여길 떠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가게 입구에는 여전히 재봉틀이 버젓이 제 자리를 차지한 채 여씨가 일감을 가져오길 기다라고 있다. 간혹 돌아가는 재봉틀이지만 그 재봉틀도 묵묵히 산곡동 사람들을 맞이했고, '미싱'이 돌아가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www.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