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안쪽 저 산 밑에 마을이 있나본데, 길도 풍경도 아늑하고 참 좋구먼."
2월 2일 화요일, 중앙선 전철 신원역에서 내려 부용산으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신원역 근처 굴다리 앞에서 등산객 몇 사람을 만났을 뿐 산에 오를 때까지 길을 오가는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철길 굴다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오른편에 아늑한 집 한 채가 나타나고 조금 위쪽 길가 빈터에 웬 비석 하나가 서있다. 무슨 비석일까 궁금하여 다가가 살펴보니 몽양 여운형선생의 생가 터 비석이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암살로 희생당한 민족지도자 중의 한 분이었던 몽양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지 못하고 비석 한 개만 덩그렇게 서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자 낮은 고갯마루 직전 왼편에는 신원2리 마을표지와 함께 옛날에 풀무가 있었던 '풀무골'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풀무질로 쇠를 달구던 대장간이 있던 곳이었다는 짧은 안내문도 함께 적혀 있었다.
고개를 넘어 언덕길을 조금 내려가자 오른편 산골짝에 아늑한 마을 하나가 바라보인다. 마을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높직한 산이 청계산이다. 길 왼편에는 두세 채의 집이 있고 집 뒤편 밭은 하얀 잔설이 덮여 있는 모습이다. 길은 앞을 가로막은 야트막한 야산을 왼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저쪽에 보이는 산이 청계산이고, 마주 바라보이는 저 산이 부용산이구먼."
나지막하지만 우뚝 솟아있는 부용산은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우리들은 왼편으로 돌아가는 길로 가지 않고 정면으로 오르는 산길을 택했다. 산길 위에는 매서운 추위에 바짝 마른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밟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비명을 지른다.
야산 위에 오르자 왼편에 또 다른 마을이 나타난다. 길은 마을 쪽으로 뻗어 있었다. 마을길을 피하여 다시 희미한 산길을 택했다. 그렇게 조금 걷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무언가 작은 동물이 잽싸게 달려와 우리들을 앞지르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길고양이가 재롱부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길동무가 되다
고양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그냥 앞질러 달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일행들을 앞질러 달리며 길가의 나무줄기를 껑충 뛰어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몇 번을 그렇게 달리며 뛰어 오른 녀석은 우리들을 돌아보며 야옹! 하고 인사를 한다. 고양이 녀석이 처음 만난 우리일행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재롱을 부리는 것이었다.
일행들이 재롱부리는 고양이를 보며 귀엽다고 한 마디씩 한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고양이의 재롱은 충분한 효과를 본 것이다. 그때부터 고양이는 우리들 사이를 오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길을 함께 걸었다. 녀석은 분명히 사람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는 고양이가 틀림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양지쪽에 있는 어느 무덤가 잔디밭에 앉아 간식을 꺼내자 고양이가 반색을 하며 다가온다. 녀석은 우리들의 간식을 얻어먹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들의 간식은 호박군고구마였다. 고구마를 조금 잘라 던져주자 고양이가 맛있게 먹는다. 던져준 고구마를 다 먹고 나면 다시 우리들을 향하여 야옹! 하고 더 달라는 듯 바라본다.
그렇게 군고구마 간식을 고양이와 함께 나눠먹고 길을 나섰다. 그러자 고양이가 따라오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간식을 나눠먹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 갔나보다 했다. 그런데 조금 걷다보니 녀석이 저만큼 뒤에서 다시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양이는 그렇게 계속 우리들을 뒤따랐다. 가끔씩 내가 사진을 찍느라 뒤처질 때면 어느새 녀석이 따라와 야옹! 한다. 빨리 가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표정이다. 그렇게 걷다가 녀석이 쪼르르 길 아래 개울로 내려갔다. 그리곤 물을 몇 모금 마신다. 간식을 먹고 난 후여서 목이 말랐던가 보았다.
물을 마신 고양이는 다시 올라와 우리들을 뒤따랐다. 그렇게 함께 걷던 녀석이 고개 너머 목왕리와 신원역, 그리고 청계산으로 이어진 길과 곧바로 부용산으로 오르는 4거리 고갯길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보인다. 녀석은 마을로 내려갈 것인지 우리들을 계속 뒤따를 것인지 망설이기라도 하는지 마을로 가는 길과 우리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들을 뒤따른다.
"아니 저 고양이 마을로 내려간 줄 알았더니 계속 따라 올라오네. 저 녀석 저거 집고양이야?, 길고양이야?"
"사람을 따르고 하는 짓을 보면 집고양이 같은데, 산꼭대기까지 따라오는 걸 보면 길고양이 같기도 하고..."
일행들이 계속 따라오는 고양이를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녀석은 그렇게 부용산 정상까지 우리들과 함께 올랐다. 정상에서는 우리일행들과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러나 산꼭대기 공터에 있는 어느 무덤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두 부부의 옆으로 달려간 후론 우리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두 부부로 보이는 남녀 네 사람은 점심식사를 하며 고기안주를 곁들여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부용산은 정상이래야 해발 367미터로 나지막한 산이다. 산꼭대기는 상당히 넓었는데 몇 기의 무덤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무덤과 주변 잔디밭이 등산객들의 좋은 점심식사자리로 이용되고 있었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매우 좋았다.
북쪽으로는 청계산 산줄기 뒤로 용문산이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북한강을 건너 운길산이 예봉산줄기로 이어진 풍경이 아름답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멋진 경치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팔당호수를 이룬 두물머리가 발아래 펼쳐진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 웬 부인당이 있지? 건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데."
"응 이곳에는 옛날 왕에게 소박맞은 어느 왕비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그러고 보니 이 산 이름이 부용산이잖아. 부용산 하면 슬픈 시와 노래가 떠오르는데."
부용산이라는 산 이름을 가진 산은 몇 개나 된다. 춘천의 부용산, 충북 음성에 있는 부용산, 그리고 의정부와 전남 장흥에도 부용산이 있으니까. 그러나 부용산 하면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든 전남 벌교에 있는 부용산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04년에 작고한 박기동 시인의 시 '부용산'이 바로 전남 벌교에 있는 부용산에서 비롯된 시이기 때문이다. 1997년 안치환과 한영애가 불러 근래 노래로 알려진 부용산은 참으로 슬픈 사연과 역사가 깃들어 있다. 연전에 우연히 읽은 박기동이 쓴 '부용산'이라는 책에는 시와 노래에 얽힌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름이 같은 산에 올라 떠올린 박기동 시인의 시 부용산과 슬프고 억울한 사연
일제시절인 1917년 전남 여수에서 한의사 박준태의 아들로 태어난 박기동은 가정 형편이 좋아 일본 유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다. 벌교중학교 교사시절이던 1947년 누이동생 박영애가 24세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을 앓다가 사망하자 벌교에 있는 나지막한 부용산에 그를 묻고 내려오며 지은 시가 '부용산'이다.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1917. 11. 28~2004. 5. 9)의 시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동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가득담긴 서정성이 뛰어난 시다. 박기동은 그 후 목포에 있는 항도여중으로 전근을 한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8년 항도여중에서 천재소녀로 이름을 날리던 김정희라는 여학생이 역시 아직 어린 나이로 죽는다. 그를 아끼던 음악교사 안성현(1920~2004)이 애제자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작곡했는데 노랫말이 바로 박기동의 시 부용산이었다. 박기동의 시 내용이 아직 젊은 나이에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 애제자를 잃은 안성현의 마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노래는 곧 목포는 물론 보성과 벌교 일대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반란 사건'으로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에게도 애창곡이 되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후에도 여전히 지리산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 노래의 서글픈 가사가 쫓기다가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 빨치산 자신들의 처지와 정서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작곡한 안성현은 전쟁 중에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따라 월북했다.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기도 했으며 유명한 작곡가였던 안성현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조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기동의 시 부용산과 노래 부용산은 좌경시로 지목되고 빨치산노래라는 딱지가 붙어버렸다. 좌경시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박기동에게는 감시와 미행이 항상 뒤따랐고 교직에서도 밀려났다.
시인이면서 시집 한 권 낼 수 없게 된 박기동에게는 참으로 억울하고 숨 막히는 암울한 세월이었다. 그렇게 억울한 삶을 살아가던 박기동은 마침내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령에도 불구하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고 만다. 억울하고 암담한 마음이 오죽했으면 그렇게 떠났을까.
그러나 그의 호주 생활은 비참했다고 한다, 호주정부에서 주는 우리 돈 40여 만 원의 연금으로 생활했으니 말이다.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던 그를 찾은 것은 고국의 지인들이었다. 옛 노래를 다시 되찾기 위해 노래의 2절 가사를 부탁한 것이다.
한편의 완성된 시에 다시 덧붙여 시를 쓴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자신의 시를 아끼는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여 노래 2절에 쓰일 시를 덧붙여 창작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는 2절 노래로 쓰일 시를 쓰면서 한참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세월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을까. 그리고 그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2003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다가 겨우 1년이 지난 2004년 5월 9일 사망했다.
젊은 나이로 요절한 누이동생을 기려 지은 서정시가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었다하여 어찌 좌경시인으로 낙인 찍혀야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감시하고 배척하는 세상이 어디에 또 있을까? 박기동은 참으로 의롭지 못한 한 시대의 희생양이 된 너무나 억울한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참 웃기는 나라야, 그렇지 않아? 어떻게 그런 억울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어? 하긴 그보다 더한 일도 많은 세상이긴 하지만."
박기동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양수역 쪽으로 내려가는 솔밭 산길을 걸으며 일행 한 사람이 푸념처럼 울분을 토한다. 날씨는 여전히 싸늘하고 추웠다. 뒤돌아 본 벌교의 부용산이 아닌 양평 양서면에 있는 부용산 봉우리 너머 하늘이 박기동의 시처럼 한없이 푸르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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