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작은 필리핀'이라 불리는 서울시 혜화동 대학로 명소 필리핀장터(Philippine Market)가 이전 위기에 처했다.
혜화동 로터리 길가에 자리 잡은 필리핀장터는 13년 동안 혜화동 성당에서 특별미사를 보는 필리핀 이주민 1000여 명을 상대로 매주 일요일마다 열렸다. 하지만 최근 종로구청이 시민들 보행에 불편을 주고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동성고등학교 강당이나 종로3가역에 있는 낙원상가 주위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종로구청 건설관리과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해당 장소가 '디자인 서울 거리'로 지정되어 길 안쪽에 작은 물길과 인공폭포를 조성해 놓았는데, 필리핀장터 탓에 시민들이 이를 즐길 수 없고 잔디도 훼손되었다"며, "장터길 인도가 혼잡해지면서 시민들이 차도로 나오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필리핀장터가 합법이 아닌 만큼 일련의 정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필리핀장터 상인들과 공동체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필리핀공동체 회원 B(필리핀·40)씨는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은 성당 미사가 끝나는 오후 3시를 전후로 30분 정도 밖에 안 된다. 혜화동 성당부터 지하철역을 잇는 길에서 영업하지 말라는 것은 장사를 그만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며, "필리핀장터는 한국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의 얼굴이다. 아끼던 사진만 잃어버려도 마음이 아픈데, 장터가 없어지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필리핀 장터, 시장 너머 다문화 공간으로 지난 7일 오전 10시, 필리핀장터에는 필리핀 음식, 식재료, 생활용품, 국제전화카드 등을 파는 상인들이 장을 열고 있었다.
상인들은 대부분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들로 생활형편이 좋지 않아 휴일에 물건을 팔러 장터에 나온다. 이 중 A씨는 다문화가정 남편으로 최근 건강악화로 시장 수입에만 의존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장터를 찾은 쉴라(필리핀·26)씨는 "이 곳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타갈로그어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며, "한국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필리핀 음식이 그리워지면 여기서 향수병을 달래곤 한다"고 했다.
오후 2시 50분쯤, 성당에서 미사를 끝낸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약 30분 동안 많은 인파로 거리가 북적이긴 했지만, 곧 한산해졌다.
시장 상인에게 물어보니 이곳에는 천여 명의 필리핀 이주민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캄보디아인 부인과 함께 온 김모(53)씨는 "아내가 (한국에 있으려니) 쓸쓸해 하는 것 같아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 같이 나왔다"고 했다. 이 날 주변에 있는 은행들은 일요일인데도 특별영업을 하고 있었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도 한국인보다 필리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시장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미술가 허벤더루(Huubvanderloo·37)씨는 "한국에서 또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며, "필리핀, 한국인, 나 같은 외국인들이 이용하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시장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적 공간이다"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후 5시, 상인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쓰레기를 줍고, 주변정리를 했다. 트럭에 실어 가지고 나온 물건에 비하면 하루에 파는 양은 적어 보였다. 큰돈을 버는 장사는 아닌 듯 했다. 짐을 정리하던 상인 P씨는 "많이 못 팔았지만, 시장에 왔다 가는 날이면 웃음이 난다"고 했다.
종로구청은 상인들과 조율이 안 될 경우 다음 달부터 필리핀장터에 물리적 조치를 가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박일선 필리핀장터 상인연합회 회장(62)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면 먹고 살 수가 없다. 어려운 처지의 이주민들에게 내리는 이러한 조처를 이해할 수 없다"며, "다문화사회를 강조하는 만큼 형편이 안 좋은 다문화가정을 보호해야 한다. 이곳을 서울의 문화적 명소로 가꿀 수도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필리핀 장터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철수나 이전이 아닌 '재정비'"라고 했다.
필리핀장터는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과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 웹사이트에 소개될 만큼 한국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태국 남서부 기찻길 사이로 형성된 '사뭇송크람' 시장이 관광명소로 유명해졌듯 필리핀장터도 서울의 관광명소와 다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