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春雪)이 내린다.
봄비에 이어 내린 춘설이라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것일까 싶기도 하지만 오던 봄이 뒤돌아가는 법은 없을 터이다.
추위가 물러가는가 싶더니만 봄비에 이어진 춘설에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없는 사람들은 더 춥기 마련이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가난한 이들은 이미 보일러를 껐을 터이고, 연탄광을 다시 채우지 못한 이들은 그냥저냥 따스한 봄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경계가 심했던 참새들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어머니가 텃밭에 뿌려준 보리쌀이 맘에 들었던지, 까치나 비둘기를 쫓아주는 내가 고마웠던지, 아무튼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저 자기들 일에 열중을 한다.
도시에서 살다보니 요즘은 참새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춘설에 오돌오돌 떨며 먹이를 구하는 참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떠올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일했건만, 늘 삶이 퍽퍽할 수밖에 없는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신세가 저 참새와 같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까치나 비둘기처럼 몸집이 큰 놈들이 위협하면 꼼짝없이 도망쳐야 하는 참새, 그래서 나는 그들의 편이 되었을 것이다.
새들도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하는지 우호적으로 대하는지 느낌으로 알 것이다.
어머니는 옥상에 참새들이 많이 날아와 텃밭에 채소가 자랄 때 벌레를 많이 잡아먹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까치나 비둘기는 부리가 크고 몸짓이 커서 텃밭을 헤집어 놓는데, 참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의 새들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살까?
저 새들은 이 추운 겨울,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들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를 움직여야만 살아가는 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눈이 내리거나 비가 내리거나 쉴틈없이 먹이를 구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참새, 모아둔 양식도 없이 그날 그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참새, '그 옥상에 가니 그래도 음식찌꺼기가 담긴 통도 있고, 할머니가 가끔 보리쌀도 뿌려주더라' 소문이 나서 계속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하니 한편 고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단골손님들인 셈이다.
이제 거름으로나 쓰겠다고 내어버린 음식물찌꺼기, 그 내어버린 것 속에서 자신의 양식을 구하는 참새들을 보면서 내게 쓸모없는 것이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양식일 수도 있음을 본다.
80년대 초반, 미군부대 하수구에서 나오는 음식물찌꺼기를 걸러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이를 만난 적이 있다. 원주 태장동에서의 일이다. 그렇게 음식, 그 자체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음에도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무기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윤리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선하다거나 우위에 있지 않다. 때론 더 비윤리적이며 악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니까 입 닥쳐!' 한다면, 그건 아니올시다이다.
저 새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까?
그리고 저 새들처럼 가여운 이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따스한 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불을 떼지 않아도 좋은 계절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들도 조금은 넉넉해 질 텐데. 가슴 쫙 피고 곤한 잠을 잘 수도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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