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 둔 풍경 중에 시장만한 곳이 있을까. 대목 장사를 하려는 상인들과 제수용품을 사러 나온 시민들이 뿜어내는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따뜻한 그 풍경. 만일 그것이 설 연휴 하루 전의 오일장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제주 오일장으로 향하는 길. 라디오에선 대전까지가 3시간이니 광주나 부산까지는 또 6시간이니 7시간이니 하며 이미 시작된 귀성 전쟁을 알리고 있다.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절 풍경이다. 예년 같았으면 나 역시 아내와 함께 저 4시간과 9시간 사이 어딘가에서 고향을 향하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제주에 있다.
"날 풀리모 바리 갈낀데, 모할라꼬 올라카노. 마 오지마라!"
4주 전에 이곳 제주로 이삿짐 날라 오고 집수리하고 하느라 든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배려한 어머니 말씀. 덕분에 우리부부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합법적(?) '귀향면제부'를 받아놓고 이렇게 제주오일장 구경에 나섰다.
오일장은 대목장답게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빈다.
"고사리 하영 들여갑서"
"그거 얼마꽈?"
할머니들만을 위해 제주시에서 지정해준 '할망장터'. 예쁜 제주사투리 너머로 모 방송국카메라가 보인다. 옳거니. 사진을 찍다 보면 상인들에게 혼나기 일쑤인데 그래도 방송카메라는 '진골'인지라 시장인심도 후한 법. 지금부터 그들만 졸졸 따라 다니면 만사 오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이랴. 카메라맨 행동이 굼뜨기가 한정 없다. 나 역시 '느리게 살기'를 좋아하지만 시장바닥에서 사진기만 들고 있으면 그게 잘 안 된다.
"고기는 사도 않고 사진만 찍어댐서?"
방송카메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럴 땐 내게도 무기가 있다. 바로 아내.
"이 고기가 뭐예요?"
"옥돔 아가씨요."
"와, 예쁘다."
"제주에선 옥돔이랑 조기만 제사상에 올려마씸. 요 땐 갈치가 찬밥이젠."
아내가 웃기를 좋아해서 일까. 아저씨는 '육지말'을 쓰는 아내에게 묻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곧 두 사람은 예년에 비해 경기가 별로라는 둥, 그래도 설 대목이라고 찾아주는 이들이 고맙다는 둥,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 틈에 나는 옥돔이랑, 쥐치랑, 참우럭(빨간우럭)까지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생선들을 사진기에 담아낸다.
그곳 해산물장터 맞은편엔 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또 하나 있다. 뽀얀 어묵국물에는 꽃게 두 마리가 빠져있고 사람들은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어묵을 먹고 있다. 저 풍경은 나를 장터로 불러내는 힘이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장터 안쪽에 있는 식당가로 향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 먹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건 보말수제비. 보말이란 제주말로서 '바닷고둥의 일종'이다. 살이 통통 오른 보말을 색깔 고운 제주 미역을 넣고 끓인 수제비다.
아, 정말이지 제주음식은 다 맛있다. 내가 해산물을 좋아해서 일까. 이사 와서 단 한 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다. 전주음식처럼. 또 해산물은 얼마나 푸짐하게 넣어주는지…. 부디 제주로 여행 오시는 분들이 있으면 관광도 좋지만 제주음식 많이많이 드시고 가시길.
제주오일장에는 해산물이나 야채시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주 오름에서 캐어 말린 각종 약초를 파는 장터, 그릇이나 대나무 세공품 가게, 속옷과 양말 가게, 꽃이나 묘목을 파는 가게, 심지어 장터 구석에는 농기구나 칼 등을 담금질해내는 대장간도 있다.
식당을 나와 아내는 미리 적어 온 품목을 보며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 시작한다. 먼저 마당을 쓸 사리빗자루. 다음은 요강. 이건 설명이 필요하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한 것이지만, 오줌을 받아 텃밭에 거름으로 내겠다는 아내의 계획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텃밭에 심을 상추씨앗. 찾지를 못해 고사리장수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더니, 구석진 곳에 자리한 씨앗 파는 할머니께 데려다 준다. 할머닌 각종 야채 씨앗봉지 스무 여개를 널어놓고 앉았다. 애초 상추만 사려던 아내는 자리를 깔고 앉아 이것저것 만지고 물어보더니, 상추에다 치커리, 겨자까지 세 봉지를 집어 든다.
"어디 살암수꽈?"
"조천이요. 할머니는요?"
"나~안, 함덕사람이주."
"명절이라 자녀분들 다 오시면 좋으시겠다, 그죠?"
"으응, 기여. 거긴 고향 안 간?"
조천 바로 옆이 함덕이다. 할머니는 고향사람 만난 듯이 반가워하더니 직접 받았다는 부추와 시금치 씨앗을 한 움큼씩 담아주신다.
또 어쩔 수 없이 고향 부모님 생각을 하게 된다. '귀향면제부'를 받아 연휴 동안 올레 길 걸을 생각을 하면 홀가분하다 싶다가도, 온 나라가 '고향 앞으로' 달려가는 지금 우리 부부만 타향에 남겨진 것 같아 가슴 한 편이 허전한 건 또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역시 명절엔 시장만한 곳이 없나보다. 곧 만나게 될 가족들 때문일까. 예년보다 못하다 경제가 어떻다고들 하면서도 물건을 파는 이나 장을 보는 이나 마음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얼굴이 밝다. 그래서 지금, 고속도로 어디쯤이 아니라 제주 오일장에서 설을 맞는 우리 부부도 좋다.
아내가 얼른 집에 가잔다. 어제 빚고 남은 '만두속'으로 깻잎튀김을 해먹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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