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전철을 타고 중앙선 전철역인 구리역에 내리면 58만평이나 되는 넓디 넓은 왕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이 그곳으로 조선의 초대 임금인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 말기의 24대 헌종까지 조선시대 9대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집안묘역입니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이곳은 소나무를 대표로 한 수목들이 울창한 멋진 숲길이 펼쳐져 있어서,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한 나무들 사이로 왕이 된 듯 여유롭게 거닐기 참 좋습니다. 아홉 개의 큰 무덤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어진 한적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눈쌓인 길은 깊숙히 들어가면 갈수록 오래된 절집에 온 듯 피안의 세계마저 느끼게 합니다.
왕들의 무덤에서 도심 속 사색의 공간으로
번잡한 도시풍경을 지나 동구릉 입구에 다가가자 어느 샌가 주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합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면서 나이 지긋한 직원분에게 처음 와서 그런데 어떻게 돌아보면 좋을까요? 했더니 눈길에 난 발자국을 따라가면 될 거라는 뭔가 철학적인 대답을 주시네요. 정말 그런가 하고 입구를 지나 들어가보니 과연 백설이 하얗게 덮인 동구릉에는 길인 듯 보이는 곳에 사람 발자국만이 나 있습니다.
새하얀 눈과 퍽 어울리게 서 있는 홍살문 밑을 지나니 무덤에 온 것이 실감이 나면서 경건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왕들의 무덤만큼이나 오래된 소나무들이 양옆에서 고개를 숙이듯 호위를 하듯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자못 장엄하고 든든합니다. 나무 꼭대기에 쌓인 눈이 버거운지 불어오는 바람에 눈보라를 날리며 땅으로 눈을 쏟아내는 바람에 밑에서 걷는 작은 사람은 눈세례를 맞기도 합니다.
눈 내린 여느 산이나 공원에서 걸을 때와는 달리 뽀드득 발소리도 그 울림이 범상치가 않고, 나무 숲에 사는 까치나 새들의 지저귐도 맑고 청명하게 들려옵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컴퓨터를 포맷한 것처럼 비워진 것 같고, 어느새 마음도 눈처럼 하얀 도화지로 깨끗해진 것 같네요.
그 크기만큼이나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동구릉
각각의 능마다 입구에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일깨우는 홍살문이 서 있고 능 주변으로 임금이 제례를 지내는 작은 정자각과 비각이 보입니다. 홍살문부터 능까지 이어진 돌길로 만든 참도를 걸어 들어가는 순간 1400년대의 조선 초기 시대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참도는 죽은 조상들이 걷는 신도와 임금이 오가는 어도로 나누어져 있다는데 오늘은 눈이 내리면서 구분이 없어져 그만 산자나 죽은자나 같이 다니게 하네요.
건원릉은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57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의 초대 임금이 된 태조 이성계가 누워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자식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을 어쩌지 못하고 쳐다만 보다가, 죽어서도 원했던 부인 곁에 묻히지 못한 비운의 말년은 많은 드라마에서 '용의 눈물'로 표현되기도 했지요.
52년간 왕위를 지키고 83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나 모함과 의심에 못이겨 아들인 사도세자를 결국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인 영조의 원릉. 임진왜란 후 왕권보다 강화된 신권으로 인한 당파싸움에 우왕좌왕하다가 병자호란까지 겪으면서 점점 나라가 쇠락의 길을 걷게 한 시대의 선조임금이 누운 목릉.
높고 커다란 능안에는 거기에 누운 왕과 왕비 개인의 삶뿐만이 아닌, 시대에 같이 존재한 나라 온백성의 운명과 삶의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배울 때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역사가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중고등학생시절 이곳에 현장학습을 왔더라면 국사시간에 책에 줄을 쳐가며 굳이 '태정태세문단세'를 기계적으로 외우지 않아도 좋은 공부가 되었을텐데 아쉽기도 합니다.
능 옆에는 석상인 문인석, 무인석, 마석이 서 있는데 두툼한 칼을 꼭 쥐고 있는 눈이 부리부리한 무인석은 왠지 위압적이거나 무섭지가 않고, 마석은 말이라기보다는 작은 당나귀 같아 앙증맞고 귀엽습니다. 이밖에도 왕릉이 뿜어내는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정자각 처마 위에 빚은 잡상들입니다. 불운과 악귀를 막는다고 하는 잡상은 순서대로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고 하는데 왕릉에서 손오공을 만나게 하는 조상들의 해학이 재미 있습니다.
동구릉 입구에서 표를 살 때 미리 왕릉 위에 잠깐 올라갈 수 있냐고 하면 직원이나 문화해설사와 같이 오를 수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몇 백년 된 석상들도 흥미롭고 조선시대 최고의 풍수가 만들어낸 명당 풍경이 사방에 펼쳐집니다. 눈 내리는 날 서울 근교에 이런 멋진 곳은 드물 듯합니다. 자신들을 잊지 않고 찾아준 백성(?)에게 사색의 공간을 베풀어주는 조상들의 은덕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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