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토요일이었던 2006년 5월 20일, 기자는 사무실에서 휴일 당직 데스크로 근무중이었다. 5.31 지방선거를 열흘 남겨두고 있었지만, 선거 판세는 이미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우세로 굳어지는 흐름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와 지역의 현장 분위기를 종합할 때 한나라당은 서울-경기 등 11곳에서 우세였고, 민주당은 광주-전남 2곳에서 우세였고,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전북-대전에서만 우세였다. 단, 제주도는 무소속 김태환 후보가 우세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호남 3곳과 전통적으로 무소속이 강세인 제주를 제외한 11곳에서만 이겨도 대한민국 지도를 한나라당의 당색인 파란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문제는 지도의 한 가운데에 박힌 '한밭'(대전)이었다.
대전은 4년 전 염홍철 시장과 현 박성효 시장의 '리턴 매치'
당시 열린우리당으로 옷을 갈아입고 출마한 염홍철 대전 시장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한나라당 당적이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위헌결정과 이를 수정반영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의 처리과정에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은 염 시장 밑에서 6년을 함께 일한 당시 박성효 대전시 정무부시장을 공천해 맞불을 놨다.
염 후보는 선거초반에 더블 스코어 차이로 여유 있게 앞섰다. 그러나 박 후보측이 제기한 도덕성 시비로 수세에 몰리자 염 후보는 한나라당이 '행정수도 건설 폐지안'을 국회에서 폐기하지 않고 계류하고 있는 점을 집중적으로 성토하며 공세로 전환했다. 당시 KBS-SBS 공동여론조사(5. 16~17) 결과를 보면, 염홍철 48.8% 대 박성효 24.2%로 여전히 더블 스코어 격차(24.6%p)로 앞선 상황이었다.
그런데 2006년 5월 20일 박근혜 대표가 면도칼 테러를 당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반감이 박 대표에 대한 동정표로 이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박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악재'까지 겹쳤으니 '선거는 해보나마나'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한나라당 후보가 더블 스코어로 뒤진 대전으로 쏠렸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대전만 이기면 전신인 민자당 시절에 '3당 합당'으로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화한 이후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호남을 제외한 지역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박 대표로서는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살려낸 이후 각종 재보선을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지만 전국단위 선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입증할 기회였다.
한나라당은 피습사건을 선거운동에 십분 활용했다. 박 대표가 수술에서 회복하자마자 꺼냈다는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비롯한 모든 선거쟁점이 사라지고 박 대표의 병상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나라당은 사건이 발생한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피습 성토대회를 열었고, 박성효 후보는 바쁜 선거운동 와중에 서울로 박 대표 병문안을 다녀왔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지역패권 구축
선거 막바지에는 퇴원하게 되는 박 대표가 대전을 방문하느냐 마느냐가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될 정도였다. 한나라당은 투표일을 이틀 앞둔 5월 29일 퇴원한 박 대표의 전격 방문에 맞춰 대규모 유세대회를 열었다. 유세장은 선거기간 중 전국에서 가장 많은 5000명이 넘는 청중들이 모였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를 꼭 당선시켜 달라, 제가 여러분께 보증하고 약속드리겠다"라고 짧게 연설했다. 청중들은 거리가 떠날 정도로 "박근혜"를 연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싹쓸이'를 막아달라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호소는 유권자들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충청민심은 3개 광역단체장 모두와 33개 기초단체장 중 16석을 한나라당에 몰아주고, 국민중심당과 열린우리당엔 기초단체장을 7석씩 나눠줬다. 이 사건을 통해 박 대표는 그해 6월부터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국단위 선거에서 한나라당 절대 우위 구도가 구축된 것은 그때부터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까지 전국단위 선거에서 연거푸 패한 한나라당이 그후 재보선에서는 무패 행진을 기록했지만 전국단위 선거에서 여당을 참패시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현재도 지역패권 구도를 보면 지방정부는 한나라당 일색이다. 16개 광역단체장의 소속 정당을 보면, 한나라당이 서울, 경기, 인천, 부산, 경남, 대구, 울산, 경북, 대전, 충남, 충북, 강원, 제주 등 13곳을, 민주당이 광주, 전남, 전북 등 나머지 3곳을 차지하고 있다.
4년만에 흔들리는 한나라당 지역패권 구도의 '진앙'은 충청권그런데 <오마이뉴스>-'더피플'의 16개 광역단체장 후보 지지도 및 가상대결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지역패권 구도에 균열의 조짐이 보여 주목된다(2차 조사는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전국 16개 시도별 19살 이상 성인남녀 1,200명씩을 대상으로 해 전화자동응답(ARS) 조사방법으로 실시되었으며, 표본오차는 95%, ±2.8%다).
1, 2월의 두 차례 조사결과에 따르면, 오세훈 시장의 지지도가 정체 상태인 서울과 김태호 경남지사의 불출마로 혼전 양상을 보이는 경남 외에, 충청권과 제주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4년 전에 한나라당이 충청권 승리로 지역패권 구도를 완성했다면, 이번 선거에서 지역패권 구도를 흔드는 '진앙'도 충청권인 셈이다.
충청권은 세종시 문제가 지역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곳이고, 제주도는 주민소환투표로 홍역을 치른 곳이다. 대전과 충남·충북은 다른 지역과 달리 뚜렷한 선두주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격전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대전·충남권의 세종시 수정 반대 여론이 최근에는 충북까지 북상하는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선거일까지 아직 3개월여가 남아 있고 앞으로도 많은 변수가 남아 있지만,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충남] 비상 걸린 한나라당 '이완구 차출론' vs 선진당은 '늑장 공천' 전략
먼저 세종시 수정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흔든 진앙지가 있는 충남은 한나라당이 타격을 가장 많이 입고 있는 곳이다. 오마이뉴스-더피플 2차조사에 따르면, 정당 지지도는 한나라당 24%, 민주당 24.2%, 선진당 24.9%로 3당의 격차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후보 지지도를 조사하면 상황이 다르다.
선진당 류근찬 의원과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 한나라당 김학원 전 의원이 출마하는 가상대결의 경우, 김학원(17.8%)은 류근찬(26.3%) 안희정(21.4%)보다 최대 8.5%p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선진당 변웅전 의원(30%)과 안희정(22.6%), 한나라당 전용학 전 의원(16.6%)이 출마하는 기상대결에서는 오히려 지지도가 더블 스코어 가까이 차이가 났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충청권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이 때문에 행정중심복합도시 백지화에 반대해 사퇴한 이완구 전 충남지사를 공천해야 한다는 '이완구 차출론'이 고개를 든다. 실제로 이완구(40.5%), 안희정(21%), 류근찬(18.1%)의 가상대결에서만 한나라당 후보가 더블 스코어 차이로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종시 수정안 저지에 당의 존립이 걸린 선진당으로서 충남은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곳이다. 이 때문에 선진당은 '이완구 변수'를 고려해 후보 공천을 늦추고 있다. 선진당의 한 관계자도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의원들도 눈치를 보느라 출마선언을 늦추고 있고, 당도 한나라당 후보공천을 봐가며 최대한 늦춰서 낸다는 전략이다"고 말했다.
[충북] 한나라당엔 비교적 좋은 '표밭'... 박풍이 잠재적 변수
충북은 정당지지도가 한나라당 34.3%, 민주당 34%, 선진당 4.9%, 친박연대(현 '미래희망연대') 6.1% 등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비교적 '표밭'이 좋은 곳이다. 친박연대가 선진당보다 더 지지도가 높은 것은 박 대표의 어머니 육영수씨의 고향인 옥천(11.3%)에서의 높은 지지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지역은 '박풍'이 잠재적 변수로 남아 있다.
오마이뉴스-더피플 2월 조사에서는 이시종 민주당 의원(33%)이 한나라당 소속인 정우택 현 충북지사(40.9%)를 7.9%p까지 추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달 전인 1월 15일 조사에선 정 지사가 지지율 39.9%로 이 의원(29.5%)을 10.4%p 앞섰다. 이 지역 역시 세종시 수정 반대 여론의 북상 여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전] 민주당, 뚜렷한 주자 없어... 경쟁력 있는 후보 내세우느냐가 관건
대전에서는 정당지지도가 한나라당 27.8%, 민주당 25%, 선진당 19%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후보 가상대결에서는 선진당의 염홍철 전 대전시장(35.9%)이 한나라당 박성효 시장(29.4%)과 민주당 김원웅 전 의원(15.4%)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선병렬 의원이 나서는 가상대결에서는 염홍철(40.3%), 박성효(30.2%), 선병렬(12.5%) 순으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당적을 자주 바꾼 염 전 시장에 대한 '비호감'도 크기 때문에, 선거전이 본격화되면 한나라당-선진당-민주당 사이에 팽팽한 접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이곳은 민주당의 뚜렷한 주자가 없어 얼마나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우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당 지지층별 후보 지지도를 보면, 박성호 시장과 염홍철 전 시장은 각각 한나라당과 선진당 지지층의 70% 가량이 지지했으나 김원웅 전 의원은 민주당 지지층의 38%만 지지했을 뿐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지지층의 표 분산 현상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1월 조사에서는 민주당 중진 박병석 의원이 나서는 가상대결에서 3파전 양상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박 의원은 차기 원내대표 출마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충청권 여론조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잘 모르겠다"는 응답률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인구가 비슷한 광주광역시의 경우 "잘 모르겠다"는 응답자가 50%를 상회할 정도인데 반해 대전은 13~14%대에 불과했다. 충북의 경우에도 정우택-이시종 가상대결에서 "잘 모르겠다"는 응답률이 16%대로 나타났다.
충남에서는 이완구 전 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는 가상대결에서는 "잘 모르겠다"가 16%에 불과했으나, 다른 조합의 가상대결에서는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25~27%대로 늘어났다. '이완구 변수'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얘기다.
4년 전의 한나라당 '박풍'....이번에는 '역풍' 안되면 다행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여론조사의 어려움을 얘기할 때 흔히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는 충청권 표심을 예로 든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결정을 해 놓고도 "잘 모르겠다"는 응답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충청권에서 "잘 모르겠다"는 응답률이 낮은 것이 특징이다. 충청 주민의 상당수가 이미 누구를 찍을지, 혹은 어느 당을 응징할지 마음을 정했다는 의미다. 이는 정부여당의 세종시 수정론 홍보공세에도 불구하고 충청 표심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충청권의 마지막 변수는 박근혜 변수, 곧 '박풍'이다. 4년 전에는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박풍이 선거판을 뒤집었지만,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다. 4년 전에는 박 대표가 대전에서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를 꼭 당선시켜 달라, 제가 여러분께 보증하고 약속드리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박 대표가 '보증'도 '약속'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오히려 '박풍'이 '역풍'이 안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부여당이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고 박 대표가 아무 것도 '보증'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대전-충청권 지원유세를 할 리는 만무하다. 설령 정부여당의 총공세로 충청 민심이 흔들린다고 해도 박근혜에게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한마디가 아직 남아 있다. 물론 더 결정적인 한방은 "강도는요?"(강도는 잡았어요?)라는 특유의 반문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