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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딱 28시간 남았다. <오마이뉴스>에 '오'도 알기 전인 내게 '창간 10주년 기념사'라는 원고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시간이 말이다. 또 다른 마감에 허덕이고 있는 직장인에게 이렇게 촉박한 시간을 주며 기사 청탁을 하는데도, '찍' 소리 않고 "하하" 웃으며 "알겠다"고, 전화통화라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는 걸 보면, 나 어지간히도 <오마이뉴스>를 사랑하고 있는가보다.

그러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가 과연 정상적으로 원고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기록으로 보는 오마이뉴스 10년>으로 오마이뉴스가 '콩콩' 발자국 찍어놓은 길을 따라가 보았다. 차례차례 보고 있으려니, 나는 과연 <오마이뉴스>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나, 그 사랑의 시작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007년 6월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1년여동안 끌어왔던 사측과의 줄다리기를 끝내며 편집국 현판 앞에 모인 기자들은 "굿바이~ 시사저널!" 을 외치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007년 6월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1년여동안 끌어왔던 사측과의 줄다리기를 끝내며 편집국 현판 앞에 모인 기자들은 "굿바이~ 시사저널!" 을 외치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내가 <오마이뉴스>를 알게 된 것은 2007년이 시작되고 있던 즈음이었다. 우연히 PD수첩 <시사저널 사태>를 보며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때였다. 당시 어느 복지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기자였던 나는 시사저널과 관련된 사람들이 쓴 <기자로 산다는 것>을 출간되자마자 사 읽고는 나름 꽤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주로 이런 고민이었다. 나는 정의가 끝끝내 승리할 것을 믿으며, 돈보다 진실이 더 귀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안다. 하지만 승리하기 전까지 정의는 왜 허겁지겁 돈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걸까. 마치 막장 드라마들처럼 정의는 16부 후반까지 계속 억울하다가, 종영되기 10분 전에서야 겨우 기쁨을 만끽하는 것. 난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그때 본 기사가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서명숙 기자님이 직접 쓴 글이었다. 물론 전에도 <오마이뉴스> 기사를 수차례 봤지만, 유심히 보게 된 것은 그때였던 것 같다.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사람이 편집국장을 했던 매체라니, 이후에도 서명숙이라는 이름은 제주올레로, 또 그곳에서 끊임없이 늙지 않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으로, 계속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루에 열두 번? 뻔질나게 드나드네

 누리꾼이 중심이 된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지난 2008년 5월 2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에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누리꾼이 중심이 된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지난 2008년 5월 2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에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유성호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를 제 집 드나들듯 한 것은 재작년 뜨거웠던 촛불집회 때부터이다. 나는 당시 퇴근을 하면 곧장 룸메이트와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가곤 했다. 초저녁잠이 매우 많은 내가 다음날 출근 부담을 안고서도 그곳을 향한 이유는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더니 애가 이상해졌다며 자나 깨나 큰딸 걱정인 'TK' 출신 울 엄마는 "조용히 집에서 촛불 켜놓고 혼자 집회하라"며 매일같이 전화를 해댔다. 서울로 오기 전 'TK'에 있을 때도 역시 이랬던 게 분명한 나는, 내가 아무리 콩알만 하게 작아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한 명'의 국민으로 보태질 의무를 놓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날 기회, 쌈짓돈으로 산 김밥을 전경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가슴 뜨거운 장면을 직접 볼 기회 역시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오마이뉴스>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내가 직접 목격한 장면을 가장 현실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나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내 사진이 실려 있진 않을까, 나름 기대하며 찾아보는 것도 사실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열살 사춘기 소년이여, 더 잘 자라다오

 지난 1월 15일 시민기자 워크숍에서의 나. 어디 있을까요?
지난 1월 15일 시민기자 워크숍에서의 나. 어디 있을까요? ⓒ 김대홍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내가 기자로 이곳에 동참할 시간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턱대고 아프리카 여행 기획안을 편집부로 보냈던 것이나, 내 기사에도 원고료가 나온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던 사실, 뭐 이런 것은 내가 아직까지도 <오마이뉴스>를 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오마이뉴스>는 신선하다. 그리고 영향력도 엄청나다. 아프리카 여행기 중 하나였던 '소똥,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사 때문에 '니콜키드박'(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내가 나에게 지어준 별명이다)은 네이버 검색어가 됐을 정도였다. 이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워크숍에 가서 들었던 일들도 참 신선했다.

오마이뉴스 기사로 인해 오래되고 낡고 불편했던 관습이 순식간에 시정되었다는 일들도 꽤나 많았다. 노원구청 아기 호랑이 사건 역시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이다. 나 역시도 얼마 전에 난 김용철 변호사 인터뷰 기사를 읽자마자 <삼성을 생각한다>를 구입해 열독했을 정도니까.

그런 반면,

"너의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잘 읽고 있어."

친구에게서 온 문자 때문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누구에게 <오마이뉴스>는 케케묵은 제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매체로 다가오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오마이'보다 '오마이갓'으로 불릴 만큼 생소한 매체라는 사실 또한 신선한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나 다 알려진 매체, 감춰진 속셈 따위도 그대로 드러나 너덜너덜해진, 그래서 거는 기대나 희망조차도 없는 매체보다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게 많은 게 <오마이뉴스>다. 이런 <오마이뉴스>는 꼭 이른 사춘기가 찾아온 열 살 소년 같다. 여드름도 '송송' 나 있는 소년에겐 걸어봄 직한 희망이 있다. 앞으로 자랄 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 말(言)이 곧 자기(己)가 되는 이들이 기자(記者)라고 했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은 더욱 근사하다. 모든 시민이 '말과 행동에 어긋남 없이 일치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갖고 싶었던 이름을 내게 선물로 준 <오마이뉴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님이나 진중권 교수님처럼 기하급수적인 조회수를 올려주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평범한 소시민 62000여 명에게 멋진 기자직을 허락해준 <오마이뉴스>, 그의 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내가 그에게 줄 생일 선물로는, 마감 시간을 여섯 시간이나 앞당겨 보내는 지금 이 원고와, '나'와 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제대로, 올바로 전달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더 진실 되게 쓰고자 하는 나의 기자된 마음이다.

글. 니콜키드박


#오마이뉴스#창간 10주년#축하해#고마워#박진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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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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