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탓일까? 20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 줄지어 앉은 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장했다. 바로 전날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동의안이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 국방위를 통과해 오는 25일 본회의 상정을 앞둔 시점에서 누구나 3년 전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탓이다.
"한번 빠져나온 전쟁터에 다시 뛰어드는 건 불나방과 다를 게 없다"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경고가 무색하게 현 정부는 3년 전 철군한 아프간에 지방재건팀(PRT)이란 명목으로 국군부대 파병을 착착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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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 파병 반대 행동의 날 20일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서 '평화 만들기'란 노래에 맞춰 율동을 펼치고 있는 전국학생행진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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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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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성토장 된 서울역 광장
20일 서울역 광장은 온통 이명박 정부 성토장이었다. 오후 3시부터 열린 '아프간 재파병 반대 반전평화 행동의 날' 집회에 앞서 오후 1시부터 공공노조가 주최한 '가스 연금 의료 민영화 저지와 공공부문 노동탄압 분쇄 결의 대회'가 열렸고, 오후 4시부터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야당이 주도한 '민주주의 사수, 이명박 정권 규탄대회'가 이어졌다.
지난해 10월 30일 이명박 정부가 아프간 재파병 결정을 공식 발표한 뒤 반전평화연대(준), 참여연대 등 69개 시민단체는 '아프간 재파병 반대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아래 연석회의)'를 구성해 줄기차게 재파병 부당성을 알려왔다. 특히 이들은 지난 2007년 철군하면서 "다시는 아프간에 파병하지 않겠다"던 정부가 3년도 안 돼 약속을 깬 것에 분노했다.
아프간 재파병을 바라보는 국민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다. 지난해 12월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아프간 파병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조사한 결과 재파병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이 46.5%로 절반에 가까웠고, 긍정 검토는 30%에 그쳤다. 심지어 한나라당 지지층에서조차 재검토(38.2%) 의견이 긍정 검토(35%)를 조금 앞섰다(12월 7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전화 조사,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 3.1%p).
섣부른 파병 때문에 국민이 치른 피의 대가가 아직 뇌리에 남아있는 탓이다. 2001년 미-아프간 전쟁 이후 우리 정부는 지난 2002년과 2003년 의료지원단 동의부대와 건설공병단 다산부대 파병한 뒤 매년 기간을 연장해왔다. 하지만 2007년 윤장호 하사가 바그람 미 공군기지 앞에서 테러 공격으로 숨지고 그 해 여름 샘물교회 신도와 가이드 23명이 탈레반 세력에 납치돼 그 가운데 2명이 목숨을 잃게 되자, 그해 말 국군부대는 아프간에서 완전 철군했다.
그런데 이런 여론에 아랑곳 않고 오바마 미 대통령 방한 뒤 이명박 정부가 아프간 재파병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것도 1년 단위로 국회 동의를 받아 파병기간을 조금씩 연장해온 관례를 깨고 '2년 6개월'이란 장기 파병을 추진하는 것도 더 불안케 한다.
한나라당 25일 본회의 강행 처리에 야당 반발
국방부는 지난해 12월 11일 아프간 파르완주에서 활동할 예정인 지방재건팀(PRT)의 경호를 맡을 350명 안팎의 군 병력을 오는 7월 1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2년 6개월간 파병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국회 국방위원회는 19일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전체회의를 열어 아프간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조차 파병 기간을 1년 6개월로 단축하는 수정안이 거부되자 기권했다. 한나라당은 오는 25일 본회의에서 동의안 처리를 강행할 방침이지만 파병 반대 당론을 정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과 충돌이 불가피하다.
아프간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암울하기만 하다. 아프간에서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을 펼치고 있는 미국과 나토 연합군이 지난 14일 탈레반 거점인 헬만드주 마르자 지역에서 오폭으로 민간인 12명을 숨지게 하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김덕엽 연석회의 기획팀장은 "결국 미국과 나토가 말하는 재건과 민주주의는 학살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군복 색깔이 어떻든 점령 치하 아프간에 들어간 어떤 세력도 아프간 인들에겐 적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파병 동의안 처리로 발생할 모든 비극의 책임은 현 정부와 국회가 져야한다"고 경고했다.
이정희 의원 역시 "지금까지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법안을 포기한 적이 없다"면서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야 한다, 오는 6월 2일 지방선거에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20일 오후 '아프간 파병 반대 행동의 날' 집회가 열린 서울역 광장 한 쪽에선 검은 망토에 마스크를 쓴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신호등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전쟁없는세상 '무기제로팀' 회원들의 '집속탄 금지협약 가입 촉구 캠페인'이었다.
'집속탄(클러스터 폭탄)'은 한 개의 폭탄 속에 수십에서 수백 개의 작은 폭탄을 가득 채워 반경 수백 미터에 분산시켜 떨어뜨려 '죽음의 비'로 불린다. 문제는 30~40%가 불발탄으로 남아 있다가 대인지뢰처럼 터져 민간인, 특히 아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쳐왔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에선 2008년 12월 '집속탄금지협약(CCM)'을 만들었고, 30개국이 비준해 오는 8월부터 발효된다. 하지만 정작 미국과 러시아, 한국을 비롯한 주요 집속탄 생산국들은 빠져 있어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여옥씨는 "검은 망토와 가면은 적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넓은 지역에 뿌려져 적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피해자를 양산하는 집속탄을 상징한다"면서 "군대가 재건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도 아프간 파병에 찬성하는 논리가 '이익' 때문인데, 무기 판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