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와 처음 만나게 했던 두 개의 길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의 날씨와 바람 그리고 공기의 향기까지 그려낼 수 있다. 내 나름대로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적어본다.
공장노동자로 살던 나, 시민기자가 되다
우선, 본격적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으로 진입하던 길이 또렷하다. 2002년 12월 19일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하던 그날 밤, 내 손에는 지리산으로 향하는 기차표가 들려 있었다. 혼자 가는 길은 아니었다.
겨울 지리산은 눈꽃으로 눈부셨다. 생각보다 춥지 않고 바람도 거세지 않아 겨울 산 걷기가 나쁘지 않았다. 지리산 세석산장에서 밤을 보내고 장터목산장으로 향하는 길. 여름이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연하봉 어디쯤이었다. 함께 산에 오른 친구 여동생이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선배,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고... 좀 방향을 틀어보는 게 어때요?"헉, 내 인생이 어때서? 후배가 나를 너무 쉽게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살짝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2001년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약 2년 가까이 건설노동자 그리고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하루 3500개의 LCD모니터를 생산하는 공장노동자로 살고 있었다. 후배가 이런 내 삶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것일까? 부연 설명을 들으니 그건 아니었다.
"홈페이지나 카페도 좋지만,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하면서 공적인 글쓰기를 해보는 것도 좋지 않아요? 글쓰기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평가도 받아볼 수 있고. 당장 이번 산행 마치면 여행기부터 등록해 봐요."그때 이미 나는 <오마이뉴스> 회원이었고 시민기자로 글도 썼다. 딱 두 개. 후배의 말은 '본격적으로', 그러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라는 제안이었다. 나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향하며 "인생의 방향을 틀어보는" 것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무슨 관련이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지 며칠이 지나, 후배의 말대로 짧은 지리산 여행기를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시민기자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다.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주문을 외며 출근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종종, 하지만 끊이지 않게 <오마이뉴스>에 글을 썼다. 세월을 잘도 흘렀고, 2004년 5월이 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로 함께 일할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2004년 5월 중순, 상근직원으로 <오마이뉴스> 사무실로 향하는 첫 출근길. 시청역에서 광화문으로 걸으며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오마이뉴스> 기자다, 나는 <오마이뉴스> 기자다.'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좋은 기자가 돼야 한다는 결심이자,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늘 저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시청역에서 광화문까지 걸었다. 주문을 왼다고 소망이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버릇처럼 그렇게 했다.
시민기자 시절부터 따지면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지 8년이 됐다. 그리고 상근 직원이 된 지는 5년이 조금 넘었다. 나는 지금도 출근을 하며 '나는 <오마이뉴스> 기자다'라는 주문을 외고 있을까? 이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1342개의 기사, 그 중 내가 내세울 만한 기사는...
가끔씩 시민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썼던 기사를 떠올려보곤 한다. 부끄러운 글도, 얼굴이 화끈 거리는 기사도 많다. 너무 민망할 때면 '사람은 원래 그렇게 크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2010년 2월 22일 기준 그동안 쓴 1342개 기사 중 호기롭게 "이거 내가 쓴 거야!"라고 자랑할 만한 것들도 몇 개 있다.
가정 폭력을 휘둘러온 아버지를 목 졸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여중생의 처절한 삶, 군 제대한 지 2주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결국은 사망한 노충국씨의 사연, 특목고 열풍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공고생이라는 이유로 도심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였던 동호공고 학생들의 분노 그리고 최근 서울 노원구청 투명 아크릴 속의 두 아기 호랑이 이야기 등등.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이들의 신산한 삶이 눈에 밟힌다. 저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제대로 낼 수 없는 이들이었다. 소설가 임철우는 소설 <봄날>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니다."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데, GDP는 늘어나고, 종로에서 은평에서 그리고 용산에서 '가난의 풍경'은 지워지고 가려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는" 사람은 자꾸 늘어난다.
결국 혼자 그 강물을 건널 수 없어 강가에 주저앉아 좌절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안고 그들과 함께 울었을 때, 나는 스스로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좋은 기사를 썼다. 눈물은 힘이 센 법이다.
<오마이뉴스> 스타가 되려는 욕심을 버려야작년 6월과 7월 서울과 경기 그리고 부산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가 기억난다. 수천수만의 사람들과 함께 떠난 이의 삶의 돌아보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은, 수십만의 팬클럽을 거느린 빅뱅, 독방신기, 소녀시대가 아니었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한 곡을 부르는데 수천만 원을 받는 '빅스타'가 아니었다. 울고 싶을 때 함께 울어주는 그들은 "이 땅은 4대강 사업 같은 성형수술 안 해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 할 줄 아는 윤도현, 강산에, 신해철, 윈드시티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아이돌 그룹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
내가 그리고 <오마이뉴스>가 오만하게 보였던 세월이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길든 짧든 그렇게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건 <오마이뉴스>가 어울리지(?) 않게 빅뱅이나 소녀시대 같이 되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란 욕망을 품었을 때일 것이다.
이제 10살이 돼 새로운 출발선에 선 <오마이뉴스>는, 낮은 땅의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대신, 더 크고 빛이 나는 '스타'가 되려는 욕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선언에는 입은 있으나, 발언권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권리를 부여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지금도 나는 시민기자 활동으로 이끈 지리산 길, 그리고 상근기자로 첫 출근하며 주문을 외던 시청역에서 광화문까지의 길을 생생히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 역시 지난 10년 동안 <오마이뉴스>가 걸어온 길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를 잊지 않을 때, 미래로 가는 길은 활짝 열린다. 오래된 미래는, 저 멀리 라다크에만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