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꽃, 옛 선인들의 삶 속에 면면히 녹아흐르는 꽃, 매화. 그 매화가 입술 연 모습을 그동안 무던히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무위사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홍매화가 수줍게 입술을 열고 반겨주었다.
어느 사찰이나 나름의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일반인이 알아차리기는 극히 어렵다. 그것은 불교문화의 동질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지순례를 떠나보면 성당도 마찬가지다. 형상을 다르게 표현하기에 겉보기에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그러나 좀 더 다가가면 느낌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불교문화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심오한 불교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턱없이 부족해서 늘 아쉽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욕심 없이 내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겨오는 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게 꽤 오래 사찰을 순례했다. 그런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찰이 있었으니 그건 강진에 있는 무위사였다.
무위사에 대한 첫 느낌은 요란한 꾸밈이 없어 소박하고 편안했다. 돌과 흙과 목조건물이 전부인 무위사는 어느 시골집 넓은 안마당처럼 자유로웠다. 노자는 춘추 시대의 어지러운 세태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무위자연의 사상을 내걸고 현실을 외면한 은둔과 도피의 철학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고 늘 가슴 속에 무위를 생각하며 살고자 하는 내게 무위사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다가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느 사찰처럼 울긋불긋 화려한 단청도 없다. 최소한의 단청을 한 성보박물관과 뒤편에 자리한 한 동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무런 장식없이 나무의 색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곳곳의 돌계단과 돌담들은 정겨운 시골풍경에 대한 향수를 안겨준다.
또한 무위사에는 다른 곳에는 남아있지 않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이 그대로 남아있다. 야단법석은 큰 행사가 있을 때는 많은 불자가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설치된 법석으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로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으로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된 말인데 이제 본 의미는 사라지고 비유의미만 살아있는 듯하다.
무위사의 당우(堂宇)는 본 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목조건물의 아름다움은 늘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지지난 해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불타자 목조건물로는 국보 제2호인 무위사 극락보전이 언론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화재란 생명은 물론 귀중한 문화재를 앗아가는 무서운 첨병이다. 나는 인간의 생명보다 문화재의 손실을 더 우위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문화재는 세대를 넘고 넘어서 영원히 연결되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미군이 바그다드를 무차별 폭격할 때 최소한의 역사의식조차도 없는 그 무자비함에 치를 떨었고 따라서 죄악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유구한 세월 동안 문화를 키워서 지키고 간직해온 인류문화를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무참히 폭격해버리는 잔인함과 비인간성에 그들이 진정 인간인가 싶어 절망했었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류문명을 어디서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깝고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비(碑)란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하여 돌, 나무,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놓는 것을 말한다. 보존각 앞에 있는 보물 제507호인 선각대사 편광탑비는 54세로 입적한 신라 말의 명승 선각대사를 기리기 위해 거북이 형상 위에 세워놓은 탑이다. 왜 기이한 표정을 한 거북이 등 위에 탑을 세웠을까 궁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무위사의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조선 초기(세종 12년, 1430년)의 목조건물로 연대가 확인되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섯 차례(1956~1984) 중수하면서 사면벽화는 원형 그대로 뜯어내어 따로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원 건립에 있어 벽화의 제작은 그 내외공간의 장엄(莊嚴) 및 장식을 위한 필수요건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의 장식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원(深遠)한 교리상의 체계를 배경으로 성소(聖所)를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동시에 교화(敎化)의 역할도 겸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천정 , 벽면 , 기둥 , 문 등에 그에 알맞은 불교적인 소재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것은 기독교 벽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탱화가 많지만 예전에는 불국사화(佛國寺化)시킨다는 이상에 접근하려는 방법으로 사원의 장엄함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벽화를 많이 그렸던 것이라 한다. 벽과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탱화가 주는 느낌과 벽화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처음 벽화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벽화들이 간직하고 있는 천 년의 숨결이었다. 벽화 하나하나를 감상하고 나니 마치 내 안에서 수 세기가 흐른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벽화 앞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탱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강렬한 느낌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였으나 오랜 세월 견디어온 사찰의 잦은 중수로 곧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자, 해체보수를 시도하여 벽화를 통째로 들어내서 1975년 벽화 보존각을 세우고 그 안에 사면벽화를 봉안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두 소중한 보물들이라 철저한 관리를 위하여 오후 4시 반까지만 개방하고 이후에는 자동으로 문이 닫힌다. 그 벽화들을 다행히 보존각에 잘 보관하고 있어 운 좋게도 내가 조우할 수 있었으니 문화재가 걸어온 지난한 역사 앞에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음미하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비록 투박하고 깨어져 손상이 된 부분도 많지만 우리 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이 귀한 벽화들이 부디 오랜 세월 소중하게 간직되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물려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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