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올레길이 다양하게 나고 나서 제주도는 그야말로 올레꾼들의 천국이 되었다. 날 좋은 날은 물론이고 염기 먹은 흐린 비 내리는 날에도 운동화 끈 질끈 매고 올레길을 걷는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 길이 있었던 것처럼 '놀멍(놀며) 쉬멍(쉬면서) 걸으멍(걸으며)' 한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길도 원래부터 있었던 길은 없다. 어떤 길은 새로 나기도 하고, 어떤 길은 잊히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길이 그렇듯, 길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길은 없어서 사람의 사연과 함께하지 못하는 길은 조금씩 잊혀가다가 어느 순간 없어져버리고 만다.
제주도 서귀포시 법환포구에서 강정마을로 넘어가는 바닷가 올레를 걸으며 잊힌 길을 다시 살려내고, 없는 길을 새로이 낸 이들의 수고와 마음에 대해서 내내 생각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길을 걷지 않았을 땐 그저 잊힌 옛길 복원하는 정도로 건방을 떨었다.
바닷가 비탈진 바위 틈 사이에 조심스럽게 길을 안내하는 작은 리본이 묶여 있다. 그나마 홈 패인 바위가 없고, 온통 몽돌뿐인 바닷가엔 죽은 나무를 심어 올레 리본을 묶었다.
"어떤 돌은 침묵으로 길이 되고,어떤 나뭇가지는 죽어 사람을 살리는 이정표가 되고,어떤 바다는 외로이 걷는 자의 길벗이 되고...."- 법환포구에서 강정마을 넘어가는 올레길에서 쓴 메모 그 돌과 나뭇가지와 바다와 얘기하며 잊힌 길, 없는 길을 살려냈을 이들의 수고스런 마음. 제주 올레길을 걷다보면 간혹 경건해진다. 풍광이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길을 되살린 이들의 침묵이 바람이 되고 길이 되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이들이 올레길을 '놀멍, 쉬멍, 걸으멍'하라지만 '생각하멍(하면서)' 걷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서귀포시에서 강정마을까지 걷는 길은 제주올레 6코스와 7코스다. 서귀포 천지연에서 강정포구까지 걸었으니 20km 이상은 걸은 것 같다.
바닷가 마늘밭 너머로 눈 덮인 한라산 능선들이 이어졌지만 섬엔 벌써 봄이 와있는 듯했다. 마늘밭 돌담 아래로 유채꽃이 활짝 피었고, 벌들은 꽃술에 취해 사람 지나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황홀한 외면이다.
올레꾼의 걸음이 강정마을에 이르렀다. 설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집에서 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제쳐두고 강정마을 초입에서, 포구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싸움을 여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제주도를 외면했던 많은 이들이 강정마을 포구를 평화롭게 걸으며 다시 제주도를 살갑게 찾고 있는데 그 평화로운 길에, 마을에 전쟁을 위한 군사기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군사기지를 만들면 배후단지를 만들어서 강정마을 주민들을, 제주도 주민들을 더 살기 좋게 해주겠다는 것이 정부와 군사기지 건설을 밀어붙인 도백의 변이었다. 글쎄, '접근금지, 발포하겠음'이라는 군사기지 경고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강정올레를 걸을 이가 몇이나 될까.
해군기지 건설예정지인 강정마을 바닷가엔 '평화우체통'이 쓸쓸하게 서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정결한 바닷가 마을에서 사랑의 편지 대신 군사편지를 보내야 한다면….
"어부의 그물질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다해녀의 물질은 약탈을 하지 않는다아이의 뜀박질은 동무를 위협하지 않는다누가 올레꾼의 게으른 걸음을 지켜줄 것인가군대의 총인가섬마을 사람들의 유채꽃 같은 미소인가." - 강정마을 바닷가에서 쓴 메모섬마늘 성글게 익어가고, 유채꽃 노랗게 출렁이며 그 섬 제주도에 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섬 제주도에 '진짜 봄'은 강정마을부터 와야 할 것이다. 날선 무기 대신 평화의 꽃이 만발하는 그날이 비로소 평화의 섬 제주도에 '진짜 봄'이 오는 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