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내가 꼭 그런 짝이다. 오매불망 내 집, 내 집 노래를 불러온 것도 아니련만 어쨌든 내 집이라고 한 채 장만하고 보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불만도 많다. 하고 싶은 것이야 순수한 내 개인적인 욕망일 뿐이니까 딱히 문제될 게 없다지만 불만은 이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철 푸른 나무들로 생나무 울타리를 만들고도 싶고, 마당 가장자리를 빙 둘러 호박을 심어서 가을이면 금빛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그림을 보고도 싶다. 마당에 수박이며 참외를 가득 심어서 여름이면 멀리 떨어진 친척이며 옛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기도 하고, 채송화 씨를 잔뜩 뿌려서 페르시아 융단처럼 피어나는 꽃들 속에 푹 파묻혀 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나저나 어쨌든 매화며 복숭아며 감나무 같은 유실수들은 심어야겠기에 시작을 했는데 나무 한 그루 심으려고 땅을 파면 항상 괭이를 거부하는 것이 있다. 너는 또 뭐냐, 하고 파내 보면 가끔 커다란 돌이나 도자기 파편 같은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슬레이트 조각들이거나 콘크리트 덩어리가 얼굴을 내민다. 이놈의 콘크리트 덩어리는 뿌리도 깊고 크기도 보통이 아니어서 일단 나타났다 하면 그것을 캐내느라 하루를 온전히 허비하고 만다.
처음에는 뿌리 길이가 20센티도 채 안 되는 어린 묘목들을 여기저기에 그냥 심기만 했더랬다. 그런데 그것이 일 년을 지내고 이 년째 접어들면서 하나둘씩 시름시름 시들어갔다. 얘들이 왜 이러나 하고 나무가 죽은 자리를 파 보니 콘크리트 덩어리 아니면 슬레이트 조각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봄 가을 나무를 심는 계절이 되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여기저기 파헤치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말았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나무 숲에는 파랗게 이끼가 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숨을 곳을 찾다가 포기했다는 투로 영 흉물스럽게 널부러져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빌어먹을 현상인가 싶어서 마을 어른들께 여쭤보니 새마을운동의 잔해들 또는 유산들이란다. 새마을운동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시멘트를 아주 적게 넣어서 담을 쳤기 때문에 그 담이 무너진 뒤에는 비교적 일찍 스스로 해체가 되었지만 부자들은 시멘트를 아주 많이 넣어서 담을 친 까닭에 세월이 흘렀어도 시멘트 특유의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 단단한 것들이 비가 내릴 때마다 1밀리씩 2밀리씩 땅속으로 내려앉다가 이제는 더 이상 내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이라면 나도 어지간히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 이장을 오래 하셨던 까닭에 그 눈물과 아우성과 이상한 축제의 장면들이 내 몸에 도장처럼 새겨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댁의 할아버지를 포함한 연로하신 어른들이 쇠스랑 같은 것을 들고 와서 "이걸로 나를 찍어죽이고 그놈의 것 해라"고 소리치며 뒤로 발랑 드러누워 당신의 배를 두 손으로 탕탕 두드리던 장면들이 우울하게 그려진다.
'그놈의 것'이란 볏짚으로 된 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얹는 일을 말함이었다. '초가집도 없애고'라는 구호에 따라 마을 이장인 아버지께서는 밤낮으로 바빴다. 밤에는 군청에서 나온 담당자로부터 교육을 받고 낮에는 마치 술집 종업원처럼 날마다 집집마다 막걸리를 들고 찾아다니며 설득을 했다. 아버지와 동년배들은 한두 번이면 설득이 가능했지만 그 윗세대들은 "내가 죽기 전에는 안 된다"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때문에 사나흘거리로 한 번씩은 젊은이들이 달려들어 노인양반들을 떠메다가 방에 가둬놓고 문을 잠가야만 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풍경이 벌어지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삶에 실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부엌개량 사업 정도가 아닐까 싶다.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렵게 칼도마질을 하시던 엄마가 개수대를 만든 이후로 자유롭게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밖에 것들은 글쎄, 무궁화나 탱자나무 혹은 측백나무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생나무 울타리를 잘라내고 콘크리트 담장을 치고 나니 개구멍 같은 것이 없어져서 어른들은 제아무리 바빠도 샛길을 이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꼬맹이들은 유사시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거나 숨는 그야말로 개구멍을 압류당한 것은 물론이고 숨바꼭질 놀이의 마당 또한 그만큼 좁아터지고 말았다.
'초가집도 없애자'는 구호에 따라 없애버린 초가집은 또 어떤가. 가난한 농촌에서 초가집만한 단열제도 없었던 것을, 그것을 없애고 얄팍한 슬레이트를 얹고 나니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참새들이 둥지를 틀 곳이 없어져서 겨울이면 밤마다 참새 집을 뒤지고 다니는 은밀하고도 통쾌한 놀이를 꼬맹이들은 더 이상 즐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모내기철이면 울긋불긋 고깔을 쓰고 상모를 돌리며 한판 신나게 벌어지곤 하는 농악대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깔깔거리던 꼬맹이들의 기쁨이 새마을 창고에 처박히고 말았다. 어른들 또한 농악은 구시대의 유물이라 '새마을 시대'에는 맞지 않다는 정부 방침을 역행할 용기가 없었던 까닭에 자기 손으로 북 치고 장구 때리는 기능을 서서히 잃어버린 채 그저 밤낮으로 일이나 하는 그야말로 '농투사니 일꾼'으로 전락해 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굳어져 갔다. 그것은 사실 콘크리트의 특징이기도 했다. 물귀신 같은 것, 콘크리트는 무엇이든 자기 몸에 닿는 것이 있으면 끌어안고 함께 굳어버린다. 하지만 그런 물귀신 같은 파괴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생명력, 혹은 뿌리라고 불리는 자연현상까지 굳혀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생나무 울타리를 걷어내고 친 담장들은 십 년이 채 안 되어 균열이 생기고 비틀거리다가 털썩 무너지고 만다. 콘크리트 담장 저 아래쪽에서 생명이 죽지를 않고 끊임없이 태양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스스로 힘을 길러 콘크리트를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것들을 위해서 그 시절에 그렇게도 아침마다 '새벽종이 울렸다'고 세뇌공작을 펼쳤던 것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엄중하게 따지자면 새마을운동을 깃점으로 농민들은 완벽하게 정부의 노예가 되어갔다. 오늘날에 흔히 농가부채라고 하는 그 용어의 기원을 찾다 보면 새마을운동을 만나게 된다.
그 많은 시멘트와 그 많은 슬레이트와 그 많은 목재 그리고 페인트와 각종 부자재들을 정부는 마치 무상으로 배급이라도 하듯이 날마다 몇 트럭씩 실어다주곤 했었다. 왜? 새마을운동이 농민들을 잘 살게 해 준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수혜자는 농민이든 노동자든 일반 국민이 아니다. 이 땅에서 농민이 최초로 정부의 채무자가 된 것이 그놈의 새마을운동이다. 당시만 해도 농민들은 돈이 그리 썩 크게 유용하지가 못했다. 시장에 나가서 옷가지를 산다거나 신발짝을 산다거나 탁배기 몇 잔을 마실 때나 돈이 필요했을 뿐이고, 대개는 이웃간에 물물교환으로 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했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서 복숭아가 먹고 싶다면 통보리 몇 됫박 들고 나가면 되었고, 명절 때 돼지고기가 필요하다면 일단 몇 근 가져다가 먹고 나중에 일을 해서 갚거나 추수를 해서 갚거나 좋은 대로 하면 되었다. 그랬던 것이 새마을운동을 맞이하게 되면서 슬레이트다 목재다, 시멘트다 페인트 등등 온통 돈을 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아편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농민들은 서서히 빚쟁이가 되어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빚이라는 의식조차도 거의 없었다. 그 모든 자재들을 정부에서 보증을 하고 몇 년 거치 몇 년 상환이라는 문서가 있긴 했지만 피부로 와 닿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민들이 정부라든가 정부 비슷한 곳으로부터 받아온 것은 선거 때 일률적으로 돌리는 고무신에 막걸리 같은 것들 뿐이었다. 고무신 신고 막걸리 마시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농민들은 몇 년 거치 몇 년 상환이라는 문서에 도장을 찍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갚아야 할 빚이라는 인식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로 그저 하라는 대로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고 빨갛거나 파란 페인트를 칠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몇 년 거치 몇 년 상환이라는 대목이었다. 실제로 농민들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자재들을 사용하고도 돈 걱정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한 채로 5년 정도는 아무 일 없이 잘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날아오기 시작한 고지서를 받고서야 자신이 빚쟁이가 되는 문서에 스스로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농민들은 누구에게 빚을 졌던 것인가? 기업인가? 정부인가? 농민들이 제때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정부가 강제 집행을 나서기도 했으니 일단은 정부와 농민들 간의 거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도 기업과 농민이 직접 거래를 한 적은 없었다. 정부가 곧 기업이고, 기업이 곧 정부였던 것이다. 농촌의 새마을 운동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면 졸지에 빚쟁이가 된 농민들이 갚은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50대 재벌 가운데 새마을운동 당시 시멘트라든가 슬레이트 같은 관련 주 부자재들을 취급하지 않았던 기업은 거의 없다. 그 당시 대통령을 했던 사람의 후손들이 수조 원대에 이르는 재산을 갖고 있다는 아주 객관적인 사실보도도 이미 나온 바 있다.
그런데 슬레이트란 시멘트에 석면을 섞어서 압착하는 공법으로 만들어내는 물건이다. 석면이 일급 발암물질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일급 발암물질을 머리에 이거나 혹은 이불처럼 덮고 살아간다. 이거 뭔가 모순이 있어도 크게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의 자동차 회사 토요타 사장이 잘못된 사실 판단에 근거해 제작한 자동차를 수십 년 동안 팔아 왔다는 이유로 자국도 아닌 미국의 청문회에 출석하는 등으로 회사의 존폐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국내의 한 전자제품 회사는 세탁기를 잘못 만들었다고 스스로 리콜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잘못된 사실 판단에 근거해 제작 판매한 일급 발암물질 슬레이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폐기물 관리법 제13조 및 48조에 따르면 슬레이트를 철거한 자가 폐기물을 장기간 처리하지 아니하거나, 처리기준을 위반하였을 경우에는 처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강력한 요구와 보증약속에 따라 내 돈 주고 위험물질을 구입했는데 그 처리 또한 내 돈 들여서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몇몇 자치단체에서 슬레이트 지붕 교체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2009년 12월 22일자 <뉴시스>에 따르면 경북 의성군에서 3개 마을 32가옥을 대상으로 '희망하우스' 석면 슬레이트 개량사업을 벌였는데 그 비용은 군비와 '희망근로 우수사업 제안'공모에서 받은 교부금 등 2억8천만 원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서는 특별교부세 1억 9400만 원 등 총사업비 6억 원을 투입해 저소득층에 대한 슬레이트지붕 개량사업을 지속한다고 밝히고 있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남도의회는 2차 정례회 4차 본회의 도정질문에서 이부남 의원이 '소리 없는 살인자'로 불리는 석면 슬레이트 지붕에 대한 전남도의 처리대책을 따져 물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몇몇 기초단체에서 사업을 했거나 하고 있지만 그 규모가 참으로 가련하고 처참할 정도로 조족지혈이다. 그것조차도 원인제공자가 형식으로나마 지원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국민 세금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니 결국 피해자가 또 피해를 보는 구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최저 30만 호에서 최고 70만 호로 추정되고 있다. 어떤 보도에서는 30만으로 적고 있고, 또 다른 보고서는 70만으로 적고 있는데 어쨌든 30만호 이하인 것 같지는 않다.
뒤늦게 환경부에서 이 문제를 주목하고 뭔가 대책을 마련 중이라는 얘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 비용 또한 결국은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생명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암 유발물질을 머리에 이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그로 인해 재벌이 된 기업이나 정치인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뭔가 대책을 강구중이라는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우리의 재벌들은 이렇게도 배짱이 두둑하다. 이렇게도 뻔뻔할 수 있는, 뻔뻔해도 괜찮은 동기를 정치인들이 제공해주고 있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 소비자들은 침묵으로 그 모든 것을 추인해주는 형국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연례행사로 땅속에 숨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캐내기나 하고 대나무숲 속에 쓰러져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깨부수기나 하면서 일급 발암물질이라는 슬레이트를 이불처럼 덮은 채로 마침내 암에 걸려 죽게 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나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