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생각 없이 따라간 방사용은 방에 들어서면서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별당 아씨의 용모는 도발적이었다. 합안(鴿眼)이라 칭하는 눈은 음탕한 비둘기 눈이다. 그 눈에 촉촉이 물기가 배었다면 얼마나 도발적이겠는가. 이날 밤 두 사람은 그들만의 비밀을 만들었다.
'방 의원이 그 집을 빈번하게 출입한 건 송찬우의 병 치료가 목적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정약용의 걸음이 송찬우의 집으로 향하게 만든 이유였다.
"어서 올라오십시오. 빗발이 날릴 것 같으니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송찬우의 호방한 웃음소리에 놀라워하며 정약용은 사랑채로 들어섰다. 사냥을 좋아하는 무부(武夫)다운 냄새가 물씬 풍길 정도로 벽엔 물소 뿔로 만든 활(弓)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의 머리가 박제되어 있었다.
수원에 사는 매파가 평소 자신의 집을 출입했는데 본처가 세상을 뜬 지 세 해 만에 별당의 혼처를 들고 나타났다. 본시는 양반집안의 무남독녀였는데 어찌된 연유로 무가(巫家)의 피가 흐른다고 속사정을 풀어놓았다.
날뛰는 색귀(色鬼)만 잡을 수 있다면 혼사를 진행시키겠다는 뜻을 전해오자 평범한 일에 진력을 내던 송찬우였으니 이 일은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두 해가 지나는 동안 별 일 없었는데 사냥을 나간 송찬우가 낙마(落馬)한 일이 벌어진 후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데엔 불행한 일이 다가왔을 때라지 않습니까. 허리를 다쳤다고 민간처방을 하고 의원을 부르자 별당의 눈초리가 달라지더군요. 가끔은 이곳에 들러 내 몸을 살피는 것 같았으나 별다른 기미가 없자 무척 낙망하는 모습으로 돌아갔어요. 해서, 생각해둔 걸 별당에게 넌지시 전한 겁니다. 인왕산 암자에 해월이란 장인이 있는데 그 분이 만든 신물(神物)을 가져오면 병을 쉬이 치료할 수 있다 했어요."
비로소 얽힌 부분이 조금씩 드러난다는 의미였는지 정약용이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방의원이 정한수를 만난 건 모두가 송찬우의 부탁 때문이었는가?'다시 송찬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어지럽게 노닥거리던 잔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허리 아프다고 약재를 쓴 것은 별당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었지요. 혼사를 중매한 매파가 그런 얘길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별당은 공을 들인다고 인왕산 암자를 찾아가더니 급기야 해월의 반지라는 옥가락지 하나를 가져왔어요. 병든 지아비를 위해 그만큼 수고 했으니 내 쪽에서 상이라도 줘야겠기에 별당의 본가에 백미 열 섬과 육 고기 스무 근을 보냈습니다."예전에는 믿지 못했으니 지금은 믿을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날 오후. 보고를 받은 정약용은 제중당을 찾아가 반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따져 물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보면 정한수가 가져온 가락지는 하나인데 그것을 어찌 했느냐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전에 송찬우에게 통박 받았지 뭡니까. 내가 구해 온 반지가 가짜라는 겁니다. 분명 수(壽)라는 글자가 써 있고, 해월 스님이 만든 게 분명한데 가짜라고 다그치니 견디기가 힘듭니다.""반지를 구하려고 송찬우에게 재물을 받았는가?"
"백미 쉰 가맙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송찬우호는 무슨 일로 별당 아씨와 자네에게 같은 부탁을 했는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요즘 들어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지금은···."
"지금은 어쨌다는 얘긴가? 가만, 그러고 보니 방의원은 별당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로구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송찬우가 낙마해 사람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두 번인가 들렀을 때에···, 별당이 대문을 나서는 내 걸음을 붙잡았습니다. 인왕산 어딘가의 암자에 해월이라는 장인이 있는데 그에게 옥가락지 하나를 구해 달라는 부탁이었어요. 물론 비용은 넉넉하게 줄 것이란 말을 듣고 그 날은 별생각 없이 돌아왔었지요. 며칠 후 내가 가락지를 구해 부인에게 기통을 했더니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에 묘각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어요. 약조를 한 그 날 비가 몹시 오고 있었는데···, 이날 별당과 이상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행위를 처음부터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정한수였어요. 그 자는 우리보다 먼저 와 처음부터 낱낱이보고 있었습니다.""허?"
"다음날 정가가 나를 찾아오면서 알게 됐습니다."
방사용은 낯빛에서 핏기를 잃고 있었다.
"정가는 평생 동안 날 괴롭힐 심산이었나 봅니다. 그 동안 내게서 가져간 재물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비보(秘寶)가 있었습니다. 편작(扁鵲)의 약탕기란 것으로 그곳에 탕약을 달여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귀물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듯 싶지만, 소문을 들은 정가가 그걸 달라는 겁니다. 여러 날 고민하다···, 결국엔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게지요."
이러한 일을 견디다 못해 방사용은 별당 아씨에게 의논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궁색해졌으니 한밑천 도와주면 어디론가 몸을 피해 의원으로 일가를 이룬 후 연락을 취하겠다는 애원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 데 그 사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한숨을 몰아쉬었는데 별당이 뜻밖의 얘길 했다는 것이다.
"처녀 시절 신내림을 받은 별당이 맨발로 인왕산을 헤맨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만 해도 인왕산엔 호랑이가 출몰해 해가 지면 행인들의 왕래가 끊겼지요. 모두들 발을 구르며 무사하기만을 바랬는데 별당은 탈 없이 다음날 돌아왔답니다. 전날 별당에겐 큰 변화가 있었답니다. 산 중을 헤매다 묘각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술에 취한 정한수를 만난 겁니다. 무병(巫病)이란 게 자신의 의지로 통어할 수 없었기에 낯선 사내와 몸을 섞은 것인데 이 일은 두 해가 지나 그 상대가 정한수임을 별당이 알아차렸습니다. 방법이 없었지요. 해서, 내가 송찬우의 병 치료차 그 집에 갔을 때 만나자는 부탁을 한 겁니다. 별당은 자신의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유혹했습니다만, 묘각엔 덫을 놓은 정한수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씩 빼앗기게 된 겁니다."묘각에 간 것은 이후론 없었다고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서리배들이 그동안 수사해 온 정황을 다시 뒤집었다.
"해인사로 내려간 해월 스님은 조선의 뛰어난 장인(匠人)이지만 장사꾼은 아니었습니다. 그 분과 동고동락 했다는 보살들 얘기는 시중에 떠도는 해월의 반지라는 것은 만들지 않았답니다. 만든 건 백팔 염주 안에 부처를 새겨 넣는 그 작업 뿐이었답니다. 그 보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보를 하나 받았어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은장이 노인이 살고 있는데 손재주가 비범하답니다. 해서 내가 그곳을 찾아가 해월의 반지에 대해 아느냐 물었더니 한동안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송찬우의 부탁으로 쌀 한 섬을 받고 두 개의 반지를 만들었다고 자복했습니다."
사안이 중요했다. 송찬우가 반지 두개를 만들어 죽은 정한수와 방의원에게 주었다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송찬우는 의심이 많은 위인으로 성격 또한 잔혹했습니다. 몇 해 전 자살한 부인의 검시기록을 살피니 초검관의 소견에 흥미로운 게 있어요. 부인이 자신의 몸을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부인 스스로 그런 것인지 송찬우의 손길에 의해 그런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탭니다. 부인이 죽은 후 재취로 얻은 별당은 무병을 앓은 전력이 있습니다. 처녀시절 무병을 앓던 중 인왕산의 묘각에서 정한수를 만나 살을 섞었습니다. 그 일은 정한수가 부인을 다시 만나면서 알게 된 것으로 이때 송찬우도 사실을 알았을 것으로 봅니다."
송찬우의 세밀한 계획을 정약용은 풀어놓았다.
"송찬우는 별당을 불러 말했을 겁니다. 해월의 반지라는 걸 미끼로 정한수를 징벌하라고 했겠지요. 그렇잖아도 방의원과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보니 별 수 없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묘각에서 만났는데 그만 몸이 뜨거워져 정을 통하고 맙니다. 이것을 숨어 있는 정한수가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이구요. 방의원이 산을 내려간 후 정한수는 별당을 협박해 다시 두 사람은 짐승처럼 야합을 했을 터인데···, 그 와중에 풍지란 혈자리에 침을 꽂아 상대를 절명시키고 돌아왔겠지요. 방의원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동행한 사람은 당연히 송찬우였을 것이고!"
생각해 볼수록 끔찍했다. 정약용이 당도한 송찬우의 집안엔 탕약 끓이는 내음이 깔려 있었다. 방사용을 빈털터리로 만들고 정한수의 목숨을 빼앗은 뒤의 후련함으로 보약을 먹는 것인가. 때마침 별당 쪽에서 아낙이 걸어와 고했다.
"아씨께서 탕약을 드셨습니다. 방의원이 각별히 신경 써 지은 것이므로 한 모금도 흘리지 말고 드시라 했습니다."
"모두 드셨는데 괜찮더라 그 말이지?"
"예에, 나리."
"내 것도 가져오게. 내 약은 편작의 약탕기에 끓인 것이네."
아낙이 탕약을 가져올 동안 송찬우는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눈가엔 엷은 살기가 빠르게 흘러갔다.
"누구든 제 분수를 알아야지요. 분수를 모르는 자가 함부로 날뛰다간 불벼락 맞습니다. 어느 선비가 얼마간의 돈을 조달해 갔는데 저 약탕기를 가져왔지 뭡니까. 흔하디흔한 약탕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뜻밖에 수표교 인근에서 한약방을 하는 방의원 집안의 가보라지 뭡니까. 탕약 짓기로 유명한 방의원에게 두 첩을 같은 것으로 지어와 별당에게 먼저 마시게 했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해서···."그때 아낙이 탕약을 가져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탕약을 들고 눈가에 웃음을 띠더니 단숨에 들이켜고 박하사탕 한 알 입안에 넣었다. 그때 누군가 부리나케 대문간으로 뛰어드는 이가 있었다. 방의원 집의 하인이었다. 그는 서찰 하나를 내밀다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엔 탕약을 마신 송찬우가 피를 줄줄 토해내며 상머리에 머릴 처박는 걸 바라보았다. 정약용이 서찰을 펼쳐들었다.
<너무 경황없던 참이라 다른 말은 못했습니다만, 편작의 약탕기가 송찬우 어른 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서찰을 보냅니다. 그 약탕기는 신험 하여 틈만 나면 악한 기운이 스며든 탓에 보관할 때는 복어 알로 탕기 안을 닦아냅니다. 약탕기를 쓸 때엔 반드시 탕기 안을 몇 번이라도 깨끗하게 씻어낸 후 사용해야 합니다.>[주]
∎합안(鴿眼) ; 비둘기 눈. 관상학에서는 여인이 이런 눈을 가지면 음탕하다고 멀리하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