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이 방송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2007년 혜성처럼 등장한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걸그룹 신화를 써내려간 이후 가요계에는 수많은 걸그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인기에 비례하여 그녀들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도 하나둘 그 수가 늘어났다. 걸그룹은 TV에 출연하여 대중에게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이는 동시에 방송에서 얻은 인기로 본업인 가수 생활에도 탄력을 받아 시너지 효과를 냈고, 방송사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걸그룹 멤버들을 방송에 출연시켜 자사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과 시청률을 잡는 계기로 삼았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온게임넷의 <티아라닷컴>과 KBS의 <청춘불패>는 모두 걸그룹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다. <티아라닷컴>과 <청춘불패>는 케이블과 공중파라는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걸그룹이 주인공이라는 점과 기존의 방송이 걸그룹을 활용하던 구성과 형식에서 변화를 꾀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티아라닷컴>과 <청춘불패>. 이들의 카메라에 비친 걸그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두 프로그램을 통해 최근 몇 년 사이 방송가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걸그룹 중심의 리얼리티 쇼에 대해 분석했다.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해 기존 리얼리티 쇼와 차별화한 <티아라닷컴>
원더걸스는 2007년 3월 첫 싱글앨범을 내고 데뷔하기 전부터 이미 주목받는 스타였다. 그녀들이 데뷔 앨범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미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모두 MTV <원더걸스>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카메라에 담겨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완성된 MTV <원더걸스>는 데뷔조차 하지 않은 5명의 소녀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이제 케이블에서 걸그룹의 이름을 딴, 그녀들의 데뷔 과정과 활동 모습이 낱낱이 담긴 프로그램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소녀시대, 2NE1, 애프터스쿨 등 대부분의 걸그룹이 24시간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과 톡톡 튀는 매력을 꾸밈없이 보여줬고, 그런 방송을 통해 대중은 그녀들을 알아가고 팬덤을 형성했다.
걸그룹 티아라가 전면에 나선 <티아라닷컴>이 기존의 걸그룹을 내세운 케이블 프로와 다른 점은 단순히 그녀들의 바쁜 일상을 소개하고 나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 창업'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부여했다는 점에 있다.
<티아라닷컴>은 본격적인 쇼핑몰 창업 준비에 들어가기 앞서, 티아라 멤버들이 얼마나 쇼핑을 좋아하고 그녀들의 패션 센스와 관심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 그녀들에게 쇼핑을 하게 한다. 늦은 밤 스케쥴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그녀들은 오랜만에 하는 쇼핑의 기쁨에 피곤도 잊은 채 열광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시청자에게 왜 티아라가 쇼핑몰을 창업해야 하는지, 그 당위에 대해 설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잠잘 시간조차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는 걸그룹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인터넷 쇼핑몰을 창업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청자의 의문을 납득시키는 과정인 셈이다.
방송은 스케쥴에 치이며 피곤에 절어있던 티아라 멤버들이 3시간 남짓 주어진 쇼핑에 열광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자연스레 그녀들의 쇼핑에 대한 욕구, 열의를 내비친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편에서 티아라 멤버들이 인터넷 쇼핑몰 창업이라는 아이템에 환호하고 도전하는 모습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비춰지게 된다.
본격적인 쇼핑몰 창업 준비에 들어간 티아라 멤버들은 제법 순조롭게 일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창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물건을 파는 플리마켓을 열기도 하고, 실제 쇼핑몰 업체를 방문해 그곳에서 하는 일을 짧은 시간이나마 배웠으며, 창업 아카데미에서 쇼핑몰 창업 관련 수업을 들으며 관련 지식을 쌓는 등 창업에 차근차근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
밋밋하고 지루한 흐름 속에 부각되지 않는 캐릭터
그러나 문제는 그런 과정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너무 쉽게 진행된다는 데 있다. 그녀들의 쇼핑몰 창업의 멘토인 스타일리스트 김우리는 사실상 <티아라닷컴>의 총 책임자 역할을 한다. 처음 조언을 듣기 위해 멤버들이 불렀던 그는 단순한 조력자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실질적으로 쇼핑몰 창업을 지휘하게 된다.
플리마켓을 여는 것도, 쇼핑몰 업체에 방문해서 일을 배우는 것도, 패션지의 화보 촬영 도중 그곳의 편집장과 대면시켜 해당 패션지에 쇼핑몰의 광고를 싣게 하는 것도 모두 그가 주도한다. 그 속에 티아라 멤버들의 능동적인 생각과 의지는 없다. 그녀들은 충실한 미션 수행자처럼 그것을 따를 뿐이다.
쇼핑몰 사무실을 임대하는 일도, 그 안에 들여놓을 집기를 마련하는 일도 그녀들의 소관이 아니다. 사무실은 이미 소속사에서 마련해놨고, 그 안에서 쓰일 집기들은 소속사 대표가 건네준 카드로 사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들이 고민해아 하는 건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은 돈으로 쇼핑할 때 어떤 물건을 고르는가 하는 것, 오직 그 한 가지 뿐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티아라닷컴>이 정말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티아라 멤버들의 좌충우돌 쇼핑몰 창업기가 아닌, 그녀들이 입고 쓰는 갖가지 패션 아이템과 그것들을 착용한 그녀들의 화려한 모습, 그리고 이 거대한 상황극 속에서 시청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각자의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순탄한 과정 속에서 티아라 멤버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뚜렷한 개성과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은정은 플리마켓과 창업 아카데미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전체를 총괄하는 사장의 직함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리더십을 보여주진 못 하고 있고, 다른 멤버들은 특별한 자신만의 매력과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티아라의 팬들은 6명의 멤버들이 등장하여 매회 화사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에 만족하고 기꺼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밋밋한면서 자칫 지루하기까지 한 방송의 흐름은 그녀들의 팬이 아닌 일반적인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티아라닷컴> 제작진의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걸그룹 멤버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인 <청춘불패>
<티아라닷컴>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라면 <청춘불패>는 월드컵 베스트11으로 비유할 수 있다. <청춘불패>에 출연하는 7명의 멤버, 통칭 G7의 소속 팀은 모두 6개. 소녀시대의 써니와 유리를 제외한 나머지 5명, 나르샤(브라운 아이드 걸스), 효민(티아라), 선화(시크릿), 하라(카라), 현아(포미닛)는 저마다 다른 그룹에서 홀로 왔다.
각자의 그룹을 대표하여 나온 이들은 우선 예능 프로 고정 출연이라는 기쁨을 맛 봤다. 그러나 짧은 기쁨 뒤에는 고난과 시련이 다가오는 법. 시청률 안 나오면 봄, 가을 개편 기다리지 않고 과감히 프로그램을 없애고, 웃기지 못하면 조금의 아량 없이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키는 방송의 무한경쟁 시스템 속에서 그녀들은 예능 고정의 기쁨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방송 초기 도통 화면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효민과 선화는 갓 데뷔한 신인으로 예능 초보 티를 팍팍 내며 말하는 것마다, 행동하는 것마다 편집당해야 했다. 그래서 붙은 굴욕스러운 별명이 '통편녀'. 결국 살아남기 위해 효민은 발군의 예능감을 자랑하는 써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써병(써니 병풍)'이라는 확실한 캐릭터를 구축했고, 선화는 무식함을 드러내어 '백지선화'라는 캐릭터를 얻었다.
다른 멤버들이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진 않았다. 팀의 맏언니인 나르샤는 상의 안에 사과 2개를 집어넣어 풍만한 인공가슴(?)을 만들어 상황극을 펼치면서 '성인돌'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고, 하라와 현아는 썰렁한 개그를 연달아 펼치는 사제지간으로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다. 유리는 같이 출연하는 김태우와 러브라인을 만드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았고, 거기에 선화가 가세하면서 삼각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렇듯 모두가 각자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청춘불패>는 유치리라는 한적한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서바이벌 훈련장에 가깝다. 밭일을 하고 콩으로 두부를 만들며 소에게 여물을 먹이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얼마만큼의 웃음을 유발하고 자신의 출연 분량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아가 선화에게 "언니 그렇게 하면 방송에 안 나간다"고 지적하는 모습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기민한 동생이 예능 초보 언니를 타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재미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멤버들 중 가장 어린 현아가 이미 방송에서 쓰일 것과 편집당할 것을 구분할 줄 안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청춘불패>의 냉정한 생존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방송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진행자 부재가 아쉬워
그러나 이렇게 그녀들이 각개약진하면서 만들어낸 상황극과 재미는 단편적인 일회성 웃음에 그칠 뿐 그 흐름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문제는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흐름을 관리할 줄 아는 MC가 전무하다는 것. 최초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됐던 남희석은 결국 리얼 버라이어티에 적응하지 못한 채 하차했다. 김신영은 뛰어난 예능인이지만 프로그램의 흐름을 주도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김태우나 노주현에게 그 역할을 바랄 수는 없는 일. 결국 <청춘불패>는 시작 이후로 지금까지 쭉 진행자 없이 진행되고 있다. 가히 선장 없는 배요,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다. 선원들은 열심히 노를 젓지만 배는 갈 방향을 알지 못하고, 단원들은 최선을 다해 연주하지만 소리가 섞이지 못해 불협화음만 발생한다.
기나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유치리에도 본격적인 농사철인 봄이 성큼 다가왔다. <청춘불패> 멤버들 역시 본격적인 농사일을 하기 위해 농기구의 작동법을 배우는가 하면 자신들이 농사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경연대회에 출품하거나 소비자에게 팔 생각을 하는 등 장기적인 프로젝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중요한 건 그녀들의 농사체험이 아니다. 중요한 건 농촌이라는 야생의 배경에서 그녀들이 시청자에게 어떤 웃음을 줄 수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 각각 웃음의 흐름을 능숙하게 정리할 줄 아는 진행자의 존재이다. <청춘불패>의 제작진이 고민해야 할 것은 '시청자가 무엇을 보길 원하는가?'이다. 분명한 건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건 걸그룹 멤버들이 트랙터를 모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