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코넬리의 96년 작품 <시인>에서 무적의 연쇄살인범은 한 기자에게 꼬리를 밟힌다. 그 기자는 <로키 마운틴 뉴스>라는 작은 신문사에서 범죄관련 기사를 담당하는 잭 맥커보이였다.
잭은 시인사건으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LA 타임스>로 스카우트되고, 사건의 전모를 책으로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TV 토크쇼에도 출연하고 인세로 집도 사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잭 맥커보이가 다시 등장하는 2009년 작품 <허수아비>에서, 잭은 <LA 타임스>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황에 빠지고 인터넷 언론이 커지면서 기존 신문사들도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잭이 근무하는 신문사의 분위기도 덩달아 스산해진다. 이곳 편집실은 한 때 세계 최고의 일자리였고 동료애와 경쟁, 냉소적인 유머와 위트가 넘쳤던 곳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황량하고 암울한 전망이 대신 편집실을 채우고 있다.
잭은 한 차례 결혼했지만 지금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상태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기 때문에 다른 신문사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전에 썼던 책의 인세가 끊긴 지도 오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잭은 쫓겨나면 어떻게 밥벌이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퇴사 전에 마지막 기사를 구상하는 잭잭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LA 타임스>를 떠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2주, 그동안 그는 훌륭한 범죄기사를 한 편 더 쓰기로 마음먹는다. 기자로서의 경력에 묘비처럼 세워질, 그리고 옛 동료들이 자신을 기억해줄 만한 그런 기사를 쓰려고 한다.
그리고 한 통의 전화가 그를 그런 길로 안내해준다. 잭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얼마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구속된 16세 소년의 할머니다. 잭은 그 소년이 용의자라는 경찰의 발표를 신문에 그대로 받아썼고, 할머니는 그 기사에 대해 항의하는 전화를 한 것이다. 자신의 손자는 결백하다고, 멍청한 경찰과 기자들이 생사람을 잡고 있다고.
대부분의 용의자 가족들은 용의자의 결백을 주장한다.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해 항의를 듣는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잭은 직감적으로 이 사건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동안 1천 건이 넘는 살인사건을 취재해온 경험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살인사건은 연쇄살인이 될 가능성이 많다. 아니 이미 몇 명의 다른 여자들이 동일범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잭은 이 사건을 집중취재하기로 마음 먹는다. 운이 따른다면 오래전 시인사건처럼 기획기사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책을 써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대박은 아니더라도 기자로서 명예롭게 퇴장할 소재는 될 수 있다. 잭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할머니를 찾아가고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및 변호사들과도 접촉해 나간다.
그러던중 이 사건이 잘못된 방향으로 성급하게 수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엉뚱한 소년을 용의자로 잡게 되었다고 거의 확신하는 단계에 이른다. 잭은 10년 전 처럼 범인을 추적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다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까?
흥미로운 <LA 타임스> 기자들의 모습<허수아비>의 작가인 마이클 코넬리는 어찌보면 잭과 비슷한 경력을 가졌다. 작가도 지방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항공 사고의 집중취재로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 경력으로 잭처럼 <LA 타임스>에 입사해서 범죄 담당 기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묘사하는 신문사 편집부의 풍경도 사실적이다. 사건 현장에서 전자장비를 사용해서 민첩하게 자료를 보낼 수 있는 신세대 기자들이 있는 반면, 잭처럼 낡은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잭은 결국 그런 신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 것이다. 물론 신참이 지금의 잭처럼 LA 경찰들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고 그 결과로 누구도 얻을 수 없는 범죄관련 정보를 얻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LA 타임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디지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블로그와 트위터에 각종 소식과 자료를 올린다. 조간신문은 '뒷북일보'로 이름을 바꿔야 할 판이다. 그런 세상에서 기존의 신문사들은 예전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뉴스와 광고가 이동하는 것에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서도.
연쇄살인범들도 변화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살인방법과 패턴을 항상 그대로 유지한다. 그것 때문에 꼬리를 밟히게 될거라는 생각은 절대하지 못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경찰과 FBI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잡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해서 신세를 망치는 것은 범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허수아비> 마이클 코넬리 지음 / 이창식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