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민보안상은 남한 경찰청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남한 경찰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나왔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순간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카메라 불빛을 많이 받으니 눈이 부셨습니다."
그가 '씨익' 미소를 짓자 좌중에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외신 기자들이 곳곳에서 한국 기자들의 몸을 건드리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습이 보였다.
"선글라스는 햇빛이 강할 때 쓰는 안경입니다."
좌중에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흐린 날이나 실내에서 이 안경을 쓰면 세상이 실제보다 어두워 보입니다. 세상을 일부러 어둡게 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안경을 벗겠습니다."
남한 경찰청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자 좌중은 온통 폭소 분위기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무슨 일인지 알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남과 북은 아직도 흐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입니다. 이번 사건은 불필요하게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아 왔던 분들께 경종을 울리는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그는 수사 결과 보고문을 읽기 시작했다.
1.작년 6월 15일, 남한에 이어 북한에서도 사건이 터지자 남과 북의 장관급 회담 에서 합동수사진 결성을 즉각 합의하였다.
2.남측의 경찰청 강력범죄수사팀 총경 조수경과 경감 김인철이 비공개로 평양에 출장, 북한 인민보안성 대좌 유천일, 인민보안성 법의학 수사관 안동준 등과 4인 특별수사대를 조직하였다.
3.수사진은 범죄에 정치적이고 기만적인 술수가 있다는 점을 간파, 분단 이후 남과 북에서 벌어진 테러와 연계시켜 수사를 진행했다.
4.수사진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를 독살한 범인이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석한 응원단원 진미령임을 지문 확인으로 밝혀냈다.
5.한편 북한에서 벌어진 여성 강간 살해범을, 현대적 개념의 프로파일링과 정액 추출 유전자 감식법으로 검거하고 그가 북한에서 벌어진 두 살인사건의 범인임을 확인하였다.
6.수사진은 약물 중독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범인 주철식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 성공하여 그로부터 범인의 아지트와 통하는 중국 영파 동항대호텔의 광동요리 식당을 알아냈다.
7.식당에서 독살범 진미령을 만난 수사진은 고도의 수사 기법을 동원, 북쪽 사건의 주범인 진 대를 호텔로 불러내는 데 성공, 그를 미행 추적하여 아지트를 알아냈다.
8. 중국 저우산군도 우두외도의 섬이 테러범 양성소라는 것을 확신한 수사진의 건 의로 남·북·중 3개국이 긴급, 긴밀히 협조하여 무력 작전을 개시한 바, 범인을 일망타진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으로는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답변은 북측의 유천일 대좌와 남측의 조수경 총경이 맡겠습니다."
조수경과 유천일에게로 마이크와 카메라가 집중되었다.
"유얼스 뉴스 000입니다. 범인이 남북 냉전 세력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답변은 조수경과 유천일이 번갈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발표 내용대로 주범 진 대와 염신광은 남북분단주의자들의 2세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사업계획서에 조직의 목적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B. K. 보스코리아, 즉 '두 개의 조국'이었습니다."
"F 일보 000입니다. 남과 북 수사 공조 과정에서 이견이나 갈등은 없었습니까?"
이번에는 유천일이 답변을 했다.
"우리 인민보안성 건물에 여자 위생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남조선 조 총경님이 내리 고생을 하셨습니다."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M 방송 000입니다. 범인들은 우두외도에 테러범 양성소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현장에서 양성 중인 다른 테러범들은 왜 없었습니까?"
"현장에는 숙소, 식당, 실험실, 교육실 등의 시설과 각종 약품과 무기류 그리고 배 세척이 있었습니다. 세 척의 배 중, 한 척은 남한 배, 다른 한 척은 북한 배. 나머지 한 척은 중국 배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범인들은 사건을 일으키면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그렇게 되면 남과 북에서 각각 지원 세력과 자금을 얻어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재미동포와 재러시아 동포에게 지원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고 시간이 흐르자 자금이 압박을 받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추가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영국인 기자가 일어나 영어로 질문했다.
"더 타임스 지 0000입니다. 남북 당국은 이번 수사 공조와 합동 작전으로 각각 얻은 정치적 성과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천일이 조수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수경이 머뭇거리다가 영어로 답변에 나섰다.
"영어로 질문하시면 대답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더 타임스> 기자는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럼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으로 한국어를 배우시든지 아니면 통역을 대동하고 오시든지 하면 되겠지요. 단 이곳에 계신 한국, 중국, 일본 기자님들이 양해하신다면 오늘 한 번만 영어로 답변하겠습니다."
"땡큐!"
"브라보!"
조수경은 입을 열었다.
"남북 당국의 정치적 성과를 물으셨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라서 저는 잘 모릅니다."
"쉬엣!"
"지저스!"
흑인 여기자가 일어났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한국어로 물었다.
"범인들의 메시지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관련된다고 보십니까?"
유천일은 조수경에게 답변을 양보해 놓고 있었다.
"산상수훈은 기독교를 빛내는 아포리즘입니다. 명백하지는 않지만 범인들이 제시한 항목이 8개이고 그것이 모두 악덕이란 점에서 산상수훈의 팔복과 대조된다고 봅니다."
"범인이 그것을 의식했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조수경은 비행기에서 산상수훈을 펼쳐 놓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불현듯 떠올렸다.
"조셴일보 선준혁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안보 기강이 해이해지고 대북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이완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조수경 수사관의 부친은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친의 행적이 이번 사건 처리에 영향을 미친 바는 없는지요?"
조수경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글라스는 세상을 어둡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선 기자님 코는 다 나으셨겠지요? 다 나으셨으면 이제 선글라스를 그만 아래로 내리셔도 됩니다."
그 날 저녁 경찰청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쇄도했다.
-남과 북이 협조하면 어떤 음모도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보라! 가공할 한반도의 역사를, 외세는 언제나 폭력 세력을 부추겨 민족의 분열을 조장해 왔다.
-보스 코리아, 노노! 온리 코리아, 예써!
-주범 염신광과 진 대의 자지를 뽑아 이승만과 김일성 무덤에 꽂아 주자.
-한국의 똑똑한 여자 수사관이 나는 자랑스럽다.
-미모의 여수사관,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조디 포스터보다 낫다.
-나는 순수해 보이는 북한 아저씨 수사관이 더 좋더라.
-가증스런 조셴일보, 아직도 조동아리를 놀리다니
-조수경, 그래 너 잘났다.
-인민보안상 썰렁했다. 경찰청장은 개그 할아버지였다.
-영어 어디서 배웠는지 알려 주세요.
-이년, 알고 보니 빨갱이 딸년이었구나.
-선 기자 코는 언제 다쳤나요? 그리고 북한과 중국에 오래 가 있었던 조수경이 그건 어떻게 아나요?
-수사관인데 그걸 모르겄냐?
-내가 안경상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왜 선글라스는 가지고 물고 늘어지냐?
-프로파일러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이번 사건으로 다음 대선이 어떻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남한도 남한이지만 북한 넘덜도 정신 차려라.
-남북합동수사진처럼만 하면 된다.
-범인들은 이제 어찌 되나요?
범인들은 범행 지역에 따라 남과 북으로 나눠 수용되었다. 진 대와 염신광은 신문과 공판 과정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하수인들은 거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최면 요법 등이 동원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보인 행태가 판에 박은 듯이 주철식과 같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학대와 폭력에 시달린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린 날의 흉터를 내 보이고 상의할 어떤 소통 통로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무지했고 극도로 이기적인 면모를 보였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공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다음 회로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