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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절약은 미덕이고 검소한 생활은 품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심각한 외화 유동성 위기에 IMF로부터 긴급 자금을 비굴하게 수혈받은 우리 정부는 이런 국민들의 믿음을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공익광고에 '소비가 애국'이라면서 절약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등장했다.

9·11 테러로 급격한 정치 경제 위기를 겪을 뻔했던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부시 전 대통령은 9·11 테러 다음날 미국민들을 향해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위기 때마다 국민들에게 소비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소비가 늘어야 기업 매출이 늘고 매출이 늘면 투자와 고용이 늘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믿음에서이다. 우리 국민들의 애국심은 실로 대단해서 외환위기 시절 소비가 애국이라는 광고에 저축 계좌를 전부 털어내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저축률이 글로벌 꼴찌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신용카드 신규발급장 수가 1억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002년 이래 최고 수치다. 2002년 신용카드 발급이 1억장을 돌파한 후 2003년 카드 대란을 맞았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지금의 상황을 안일하게 판단할 수 없다.

하나 더 위험한 닮은 꼴을 찾는다면 소비가 애국이라며 국민 1인당 4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열심히 소비하던 미국이(그 당시 저축률 골찌는 미국이었다) 심각한 금융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브프라임 부실로 금융위기가 시작되고 이제는 가계발 신용위기로 2차 위기까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음을 돌아볼 때 우리나라 경제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가계는 소비하고 기업은 저축하냐?

현재 상당수의 개인들은 가불구조 안에 갇혀 살고 있다. 신용카드 소비가 일상화된 것은 기본이고 주택담보 대출과 각종 할부 잔액, 학자금 대출 및 마이너스 통장 사용으로 인해 월급날은 누더기 결제일이 되어 버렸다. 직장인들에게 월급통장 잔액이 며칠 가냐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들어오는 돈의 대부분을 지난 소비에 따르는 결제에 사용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소득이 낮든 높든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용을 손쉽게 끌어쓰다가 가불 구조의 현금 흐름 안에 갇혀 숨막히는 삶을 살고있다.

경제지표 발표는 개인들의 이런 가불구조 현금 흐름은 아랑곳 않고 행여나 가계가 소비를 줄여 경기 회복에 발목을 잡을까, 소비자 기대지수를 발표하며 경기 동향을 점친다. 소비자 기대지수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내가 나서서 소비를 해야 겠다는 적극적인 애국심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개인들의 소비결정에 그런 경제 지표들은 소비를 부추기는데 어느 정도는 기여를 하고 있다. 이렇게 비상금을 모두 털고 더 나아가 미래의 가처분 소득까지 소비를 해줬으면 경제가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최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이 전년도 보다 무려 37조7433억 원이나 저축을 늘렸다고 한다. 무려 21.3%나 증가한 수치다. 심지어 단기내에 그 저축 자산을 꺼내 쓸 의지가 없어보인다. 1년 이상의 저축성 예금이 22.9%나 증가했다고 한다. 가계부채로 하루가 다르게 시름이 깊어지는 가계의 이자 지출에 힘입어 은행들의 잠정 순익은 총 10조 원이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결국 가계의 노동 소득이 담보대출이나 신용카드 수수료 등을 통해 은행의 순익으로 이전되고 있다. 은행이 해마다 순익의 상당부분을 주주 배당을 했고 그 주주의 상당수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들의 고달픈 이자 지출이 외국인 큰 손들에게 넘어가고 있는 현실임을 불쾌하게 짐작하게 한다.

고달픈 이자를 감당하고도 남은 소득을 남김없이 소비하며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가계에 비하면 기업은 배신감이 들 정도로 저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제의 선순환논리는 비단 가계 부문의 소비만으로 경기 활성화를 담보할 수 없다. 소비가 살아나고 기업들의 투자가 활성화 되는 것이 서로 맞물려야 순환구조가 완성되는 것은 상식이지 않는가.

소득이 조금만 감소해도 당장 결제일을 걱정해야 하는 가계에 비해 투자는 않고 저축을 늘리는 기업들의 지금의 모습에서는 경기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그 덕에 가계 실질 소득이 외환위기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계부문에서도 지금의 소비를 더 유지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심지어 미래의 가처분 소득을 전부 끌어다 소비한 상당수의 가정이 경제적 한계상황에 내몰리게 될 우려를 감안한다면 기업의 저축률은 상당히 불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저축 없는 소비는 파국을 맞는다

투자를 하기 위해 종자돈을 만들어야 하고 그 종자돈을 형성하기 위해 저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저축은 가계의 재정 안전장치이자 심리적 안정기반이다. 소득이 감소하거나 목돈을 써야 할 재무사건에 대비해 일정 수준의 비상금을 들고 있어야 한다. 비상금도 없고 저축이 없는 소비는 결국 생계형 가계 부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는 그에 따른 금융비용을 발생시켜 현금흐름에 부담을 주고 다시 저축이 더욱 불가능한 구조로 몰고 간다. 채무로 인해 가계경제가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지분구조로 볼 때 가계의 금융비용은 내수 경기 활성화에 기여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배당으로 증발해 버린다.

또한 증발해 버릴 이자지출을 감당하느라 가계가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경제 활성화를 더욱 비관하게 되는 이중고가 되는 것이다. 이제 경제 살리기 애국은 기업의 투자에 맡겨두고 가계는 신용카드를 자르고 저축에 나서야 한다. 진보의 역설 저자인 그레그 이스터브룩의 말대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당신에게 행복을 사줄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불행을 사줄 수는 있다'.

그는 신용카드의 복수에 희생당하고 싶지 않다면 더 많이 저축하고 덜 소비할 것을 강조한다. 줄일 것도 없고 저축할 돈도 없다는 생각부터 들겠지만 단 몇 만 원이라도 줄여서 저축을 해야 한다. 그레그 이스터브룩의 말대로 '의지할 수 있는 약간의 저축액이 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안정감을 느끼고 덜 약해질 것이다'. 저축없는 소비는 미래의 가처분 소득을 끌어내는 것. 신용사용을 자제하고 저축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미래 어느 시점엔가는 강제적으로 신용카드를 빼앗기고 지독한 궁핍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태그:#가계 부채, #신용카드, #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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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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