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다리 건너 산사로 가는 길봄비 내리는 날 선암사로 간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맞아도 좋을 만큼 비가 내린다. 매표소를 지나 산사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시원한 물소리가 산길을 울린다.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봄이 깨어나는 소리. 봄 기운이 넘쳐나는 산길을 따라 산사로 걸어간다.
선암사 가는 길은 무지개다리 두 개가 걸렸다. 승선교(昇仙橋)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 아름다운 다리를 놓아 멋을 부린 스님들의 낭만이 멋있다. 다리 너머로 이층 누각인 강선루(降仙樓)가 보인다. 신선이 내려왔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곳인가?
강선루를 지난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그냥 붙여놨을지라도 기분이 좋다. 길옆으로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축조했다는데 삼인당(三印塘)이 자리잡고 있다. 삼인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변하며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 사상이란다. 연못 안 작은 섬에는 꽃무릇이 푸른 잎을 자랑하며 싱싱하게 덮고 있다. 여름에 붉게 피어나면 멋있겠다.
바라춤, 나비춤이 어우러지는 천도재삼인당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과 절집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절집으로 길을 잡는다. 절로 가는 길은 조용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오래 전에 생을 마감하고 몸체마저 부서져 언제 넘어질지도 모를 고목이 장승처럼 서 있다. 사람들이 고목에 염원을 하듯 동전을 올리고 소원을 빈다. 자꾸만 존재의 의미를 새겨주는 사람들 때문인지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못하고 새로운 생을 살아가고 있다.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고풍스런 일주문.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지붕이 무겁게 느껴진다. 현판에는 '曹溪山仙巖寺'라고 써 있다. 선암사는 백제성왕 7년인(529)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창건하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했는데, 그 뒤 도선국사가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이후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의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중창하였다. 지금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을 갖춘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 태고종 본산이다.
불경소리가 절집을 울린다. 만세루를 돌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니 마당에 괘불이 걸렸다. 웬 예기치 않은 행운? 절을 찾아 다니면서 이런 의식을 보기는 처음이다.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발원(發願)한다는 천도재(遷度齋)다.
천도재란 죽은 사람을 위해 올리는 제례의식으로 부처님 법력의 가피력을 입어서 죄구를 씻기어 좋은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살아생전 지어온 죄업이나 원한관계 등을 부처님 법력의 힘으로 보다 나은 세계로 가도록 스님을 모시고 영가(靈駕)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식이다.
스님들이 태평소를 불고, 바라춤을 추고, 나비춤을 춘다. 중간에 탑돌이를 하기도 한다. 천도재는 끝날 줄 모르고 오랜 시간동안 계속된다. 대웅전 사이로 올라선다. 팔상전, 원통전을 지나 뒤뜰로 나간다. 무우전 옆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선암매'는 아직 피지 않았다. 꽃망울을 부풀리고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선암사 명물 누운 소나무와 뒤깐뒤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작은 연못 위로 누워있는 소나무를 만난다.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수백년을 살았을까? 소나무는 줄기가 땅으로 뻗어나가려고 한다. 줄기가 땅에 닿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 기둥을 세워 눕지 못하게 해 놓았다. 혹 소나무가 오랜 세월 살아온 것에 지쳐서 쉬고 싶은데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누운 소나무를 뒤로 스님들의 교육장소인 무량수각이 이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소나무를 뒤로 하면 절집 화장실인 해우소(解憂所)를 만난다. 어렸을 때 변소를 뒤깐이라고 했는데…. 해우소 안으로 들어선다. 해우소 안은 넓다. 근심을 풀기에 충분히 여유가 있는 공간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화장실은 조명이 없고 칸막이만 쳐 놓았다. 그래서 기웃거리지 말라는 경고문도 적어놓았다. 누각처럼 공중에 떠있는 변기에 앉아 본다. 눈높이를 맞춘 창으로 빛이 들어와 어두운 실내를 밝혀준다. 창 위로 '파리야 극락가자'라는 문구도 걸었다. 파리는 어떻게 하면 극락에 갈 수 있을까?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어두운 화장실에서 창살 사이로 보이는 밝은 풍경,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떡갈나무에는 싱싱한 일엽초가 나무를 기어오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태고총림 선암사에서 매주 토요일, 일요일 10시에서 15시 사이에 만세루 앞에서 합동천도재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