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엉뽕'이니 '뽕팬티'니 하는 기사가 떴다. 그런데 이런 제품이 어제 오늘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신체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발에서 키높이 구두까지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럼 '엉뽕'은 신체적 결함을 감추기 위함일까? 아니면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의견이야 분분하겠지만 굳이 구분 짓고 싶지 않다. 정작 문제는 어디까지 가느냐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신체에 칼을 대는 것까지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고 그 결과도 궁금하다는 얘기다.
시골마을, 모처럼 찾아온 따뜻한 봄볕 손님으로 밭에서는 수건을 둘러쓴 아낙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풀을 매고 나무를 손질하고 봄나물도 캐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다. 일어나서 허리 한 번 펴기 힘들다는 표현 그대로다.
"아주머니 '엉뽕'이라고 아세요?""그게 뭐다요?" "지금 도시 사람들은…." "아이고 해괴망측해라." "지금 아주머니도 하고 계시잖아요." "무슨 망할 놈의 소리 이건 일할 때 쓰는 방석이여." 그러면 그렇지 그 사람들이 언제 아름다워 보겠다고 입술연지 한번 발라본 사람들이었겠는가? 도심에서 말하는 '엉뽕'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기고 엉덩이에 붙여 특정 부위가 도드라지게 보였다고 그것이 그들에게도 '엉뽕'이겠는가? 그것은 시쳇말로 종자가 다른 것이다. 그 종자에서 어떤 싹이 나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에 따라 하나는 '엉뽕'이고 하나는 '방석'인 것이다.
세상에 필요치 않은 물건이 없고 세상에 필요치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가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살인마도 전쟁터에서는 영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위 말하는 그 '엉뽕'이 있어야 할 자리는 적어도 들판이라는 생각이 더 앞선다.
덧붙이는 글 | 엉뽕 기사를 보면서 문득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 생각이 나서 그들에게 달려가 묻고 답을 얻었다. 그리고 엉뽕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