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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K.

경찰청 강당에서는 과학수사부장 이· 취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임자는 용 부장이었고 취임자는 조수경이었다. 용 부장은 이혼 말이 나돌던 부인과 화해하고 일단 결합하여 같이 살아 보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밤낮 없는 경찰의 격무 때문에 부인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니, 차제에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수경의 과학수사부장 취임은 경무관 진급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녀는 2년 정도 현장 수사를 더 하려 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김인철은 조수경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대학원 북한학과 박사 과정에 진학했고 경정으로 진급해 있었다. 여전히 그는 통일 조국의 도량 넓은 수사관이 되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이·취임식이 있은 날 저녁, 시내 호텔에서는 축하연이 열렸다. 조수경과 김인철은 북한의 유천일과 안동준이 보내온 축전을 받았다. 조수경은 선후배와 동료, 친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중에서 이색적인 것은 조셴일보 선준혁이 준 책 선물이었다. 선준혁은 그녀에게 <한국의 안보 불감증,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을 선물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색적인 선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임이 끝난 후 조수경은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파티에서 칵테일 몇 잔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한강 올림픽대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택시 기사는 앞에서 이유 없이 속도를 늦추고 있는 차 때문에 투덜거렸다.

조수경이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은 색 벤츠 리무진이 눈앞에 있었다. 벤츠는 더 속도를 늦추며 비상등을 점멸시켰다. 그러고는 아예 멈춰 서 버리는 것이었다. 앞 차가 서자 택시도 따라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택시 기사가 말했다.

"손님을 아는 분 같은데요?"

벤츠 뒷문을 열고 나와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춰졌다. 그는 조수경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브라함이었다. 조수경이 자기를 알아본 것을 안 그는 조수경에게로 다가오더니 택시 창문으로 비망록 한 권을 들이 밀고 돌아섰다. 조수경은 급히 차에서 내렸지만 이미 아브라함의 벤츠는 움직이고 있었다. 벤츠는 기민하게 차선을 바꾸면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늦은 밤, 조수경은 아브라함이 남기고 간 비망록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기침을 했다. 비망록에 배어 있는 향수 때문이었다. 택시에서 비망록을 받아 옆에 놓았을 때부터 나기 시작한 기침이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가 들여 마셨다. 그러고는 창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와 다시 비망록을 읽었다.

작년 범인이 보내온 편지를 읽었을 때에도 기침을 참지 못한 그녀였다. 평양에서 냉면을 먹으러 가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차에 올랐을 때에도 기침을 참지 못했었다. 하물며 아브라함이 여러 날 손때를 묻힌 비망록을 읽으며 연신 기침을 해 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비망록의 마지막 장을 덮은 조수경은 옆에 있는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커피 잔을 가슴 아래에 받쳐 들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창유리에 미소를 짓고 있는 아브라함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미소는 정겹거나 애틋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예의상 지어 보이는 미소 같았다. 그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나 자상함 같은 게 전혀 없었다. 그의 입가에도 아무런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았다.

수경,
친구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친구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은 친구를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야. 이제 우리의 이야기도 끝나가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정겹게 친구 딸의 이름이라도 부르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미스 조라고 부르지 않고 수경이라고 허물없이 부를까 해.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나의 호칭이 무례나 비례로 비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면 우리의 인연도 다하는 거겠지? 수경도 알고 있듯이 나는 수경의 친구가 아니고 수경 아버지의 친구일 뿐이니까.

먼저 사건의 마무리를 해야 하겠어

역사적인 남북합동수사반은 놀라운 성과를 냈어. 미궁으로 빠질 뻔했던 음습한 정치 테러극을 밝은 햇빛 아래에 까발려 놓았으니까. 정치 테러의 실상과 배후가 공권력의 수사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좀처럼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 그것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했다는 의미 이상의 성과를 낸 것이야.

사건 해결은 냉전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남과 북의 분위기를 반전시켰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제 코리아 인들이 섣불리 속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지. 그들은 민족을 이간질하고 전쟁을 부추겨 왔던 세력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어 왔던 수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생생히 목격하게 되었어. 만금을 치르고서도 이룰 수 없는 놀라운 학습 효과를 단기간에 거둔 것이지. 이번 사건이 해결됨으로써 남과 북이 함께 이루려는 평화의 주행은 탄력을 받게 될 거야.

하지만 진실로 사건은 모두 해결된 것일까? 정치 테러의 진상이 당대에 공개되는 법이 일찍이 있었던가? 진 대와 염신광은 최종적인 배후 주범일까? 그들의 말대로 B. K.는 '보스코리아'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요즈음 밤잠을 못 이루고는 하지. 그들 위의 범인 즉 옥상옥의 배후는 없는 것일까? 있다면 누가 무슨 동기로 그 천인공노할 연쇄살인극을 연출한 것일까?

나는 수경 역시 이런 의문과 의혹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지. 수경이 온갖 수단을 다해 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함께 먹은 이후로 수경에게 한사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 그러는 사이 불과 몇 달 만에 그 가공할 사건도 이제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서고 말았어. 그래서 나는 오늘 밤 노상에서나마 잠깐 수경에게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

잠옷으로 갈아입은 조수경은 침대에 누웠다. 하얀 천정에 아브라함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수경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슬픔도 없었고 그의 입언저리에는 아무러한 분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수경,
염동진·진다이로 대표되는 극우·극좌들의 정치 테러는 무려 60년 동안 묻혀 있었어. 그것도 2세들의 무모한 재범행이 있었기에 드러난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영원히 감추어질 뻔했던 사연들이었잖아?

지난 주 인혁당 재심 3차 공판이 열렸더군. 남한에서 벌어진 극우주의자들의 정치·사법 테러가 밝혀지고 있어. 이것은 역사의 이면으로 묻힐 뻔했던 대표적인 사건이었지. 이것이 드러나는 데에는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나봐. 수경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과 맞먹는 세월이지. 그나마 이것도 한국에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수경이 태어나기 전 해인 1974년 봄, 박정희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학생운동 세력의 뿌리를 뽑아내려고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지. 당시 전국의 대학생들은 민주청년학생연맹, 즉 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연대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어. 민청학련의 간부들은 주로 서울 문리대생들이었지. 그들은 지금 대부분 민주화운동의 전력을 밑천 삼아 한자리씩들을 차지하고 있지. 그 훈장은 그들의 생계와 출세를 위해 요긴히 사용되고 있어.

그러나 이들보다 더 먼저 지방에서 한 무리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소리 없이 민주화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어. 그들은 신문기자거나 대학 강사거나 대학생들이었지. 극우주의자들은 청년들에게 '인혁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어. 그리고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이라고 발표했지. 이듬해 서울대학생들은 풀려났지만, 인혁당이라고 이름 붙여진 지방의 청년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있었지.

극우주의자들은 9명의 청년들에게 배후 또는 주범 혐의를 씌우고 자백을 강요했어. 청년들의 심신은 야만적인 고문으로 인해 흐물흐물한 걸레자락이 되어 있었지. 청년들이 쉽사리 자백을 하지 않자 극우주의자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빨리 실적을 내서 발표해야 했거든. 고문의 방법과 기구가 다양해지면서 그 강도가 높아졌지. 고문의 한계도 없어졌어. 고문 중에 죽여도 괜찮다는 지침이 내려졌지.

9명 중의 하나가 극우주의자에게 말했어. 우리끼리 협의할 시간을 달라고. 그리고 9명 중의 하나는 8명의 친구들에게 속삭였지.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한 명이라도 살려내 훗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하자. 마침 우리 중에 가장 나이 어린 건이가 미국에 연고가 있다."

9명 중의 하나는 극우주의자에게 제의했어.

"우리 중의 하나를 석방하여 미국에 보내 준다면 나머지 우리는 모두 순순히 진술하고 서명하겠소."

이런 제의를 한 그 '9명 중의 하나'가 바로 수경의 아버지였어.

건이라는 청년은 미국에 가서 돈을 벌었지. 그의 미국 이름은 아브라함이었고. 이렇게 아브라함은 친구의 목숨을 팔아 삶을 도모해야 하는 기구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봉착했지.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바이블의 진짜 아브라함만큼이나 난감했어.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몰라. 그는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의 중간쯤 되는 사람이었지.

그것은 연쇄살인범이 지니고 있는 어린 시절의 상처처럼 아브라함의 가슴에 검은 피로 멍울져 굳어 버렸지. 그에게는 가슴 속의 흉터를 내 보일 그 어떤 소통 통로도 없었어. 그는 죽은 친구들의 원수를 갚아야 자기가 살 수 있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지.

하지만 아브라함은 보다 더 사려 깊어져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혔어. 그는 죽은 친구들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를 깊이 헤아려 보았지. 아울러 친구들을 죽인 자의 정체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는 크게 보아 극우뿐 아니라 극좌도 자기의 원수라는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되었지. 또한 그는 음습한 테러와 역발상의 뒤통수치기가 극우·극좌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

아브라함은 심사숙고했어.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이고 많은 경비를 쏟아 준비했지. 그는 남과 북을 오가며 염동진과 진다이의 아들을 찾아냈어. 2세 염신광과 진 대는 오래 교육하거나 세뇌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생득적으로 극단적이고 폭력적이었어.

아브라함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아주 좋아했어. 산상수훈은 세속적인 계율로는 가장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사실 그가 가장 좋아한 성경 구절은 시편 23편이지만 그는 그것은 자기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여겼지. 자기는 시편처럼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어. 왜냐고? 그에게는 과거의 흉터가 있었으니까. 아브라함은 염과 진에게 거액을 송금하고 B. K.라는 조직을 만들게 했지. 그는 산상수훈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직접 물색했어. 8명을 죽이는 연쇄살인극은 이렇게 막이 열린 것이지.

그렇다면 체포된 염신광과 진 대는 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끝내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같은 것이지. 여기에는 아주 복합적인 요인이 개재해 있어. 배후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불명료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거야. 하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입을 열어 봐야 자신과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어차피 죽을 거, 하수인이 되고 싶지도 않았을 거고.

성공하는 정치 테러는 당대에 배후가 밝혀지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배후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성공한 테러라고 할 수 없지. 수경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는 데에도 30년이 걸렸잖아?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의 진상도 30년쯤 후면 밝혀질 수 있을까?

염신광과 진 대는 영광스러운 보스 코리아(Both Korea) 즉 B. K.의 지도자로 남기로 했나 봐. 연쇄살인범이나 극우· 극좌주의자들은 모두 사이코패스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들은 이상한 데서 삶의 존재감을 구하지.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보인 죽음의 모습을 상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염신광과 진 대는 진짜 B. K.는 아니었어. 오리지날 B. K.는 그들을 조종하여 범죄를 사주한 사람이겠지. 그는 일찌감치 조국의 국적을 버리기로 했어. 그러고는 스스로'배후의 조국'이라고 자처했지.

그는 자기가 배후에서 조국을 돌본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또 하나의 사이코패스지.
배후의 조국,
즉 백 오브 코리아(Back of Korea),
그가 진짜 B. K.였어.

그 날 밤 조수경은 꿈에서 아브라함을 만나 수갑을 채웠다. 그러고는 그에게 담담한 어조로 속삭였다.

당신은 B. K.가 아니라고,
연쇄살인범이라고.
                                      (끝)

덧붙이는 글 | 오늘로 소설을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BK#사이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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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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