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촉촉이 내렸던 지난 15일, 어느 조간신문에 '노인들의 전철 무료이용 개선 문제를 놓고 정부가 고심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2008년도 전국의 전철과 지하철 영업 손실금액은 모두 9275억 원인데 무임승차 승객들로부터 요금을 징수했을 경우 손실액의 36%(3315억 원)를 줄일 수 있고, 무임승객의 80%가 65세 이상 노인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 관할부처인 국토해양부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해당요금의 20% 정도를 받는 방안 ▲연령과 소득에 따라 요금에 차등을 두는 방안 ▲출퇴근 시간이라도 요금 일부를 받는 방안 ▲1인당 이용 횟수를 제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 오후 도심 외출을 위해 4호선 미아삼거리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승강장으로 내려가자 7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승강장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름 아닌 조간신문에 보도된 노인들의 전철·지하철요금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심 시장 길 걱정하는 할머니들과 물건 배달 할아버지의 한숨"앞으로는 지하철도 공짜로 못 타게 되려나 봐요?""왜요? 갑자기 지하철 돈 내야 된대요?""아침에 애들이 신문 보고 하는 말인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 암튼 공짜 전철 못 타게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니까."할머니들의 옆자리에 앉아 대화를 듣다가 지하철이 들어와 함께 전철에 올랐다. 할머니들은 마침 자리가 비어 있는 노약자석에 나란히 앉았다. 그 옆에는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들에게 어딜 가시느냐고 물으니 동대문 시장에 간다고 했다.
동대문 시장이 동네 시장보다 물건 값이 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없게 되면 자주 이용하던 동대문 시장도 세 번 갈 걸 한 번으로 줄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지하철·전철을 무료로 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그럼 이제 이 짓도 못해 먹게 생겼군."
할머니들의 설명을 들은 할아버지가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낙담하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자 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해 물건 배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올해 76세라는 노인은 체구는 작았지만 나이에 비해 날렵한 모습이었다.
"늙어서 편히 먹고 살 돈을 벌어놓지 못해 이 나이에 배달 일을 해서 할멈하고 먹고 사는데 전철요금까지 내라면 살기가 더 힘들어 질 것 같네요."노인은 정말 걱정이 되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노인은 배달 전문 업체에서 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하여 물건을 배달하고 수금까지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배달료와 함께 교통비를 받아 한 달 몇 십 만원의 수입으로 노인부부가 살아가는데 교통비를 내게 되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동대문역에서 1호선으로 바꿔 타고 회기역으로 간다는 노인과 헤어져 반대방향인 종로3가에서 내렸다. 종로3가역 대합실에는 마침 어느 종교단체에서 노인 대상 이발봉사를 하고 있었다. 봉사단체 관계자에게 물으니 매주 월요일마다 이곳에서 1천여 명의 노인들에게 이발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체념하고 포기해 버리는 노인들
노인들은 봉사단체 관계자가 손바닥에 사인펜으로 써준 번호에 따라 이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며 계단에 앉아 있던 노인들에게 조금 전 4호선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들 이야기를 해주자 "늙은이들이 무슨 힘이 있나, 전철도 돈 내고 타라고 하면 이런 곳에도 못 나오는 거지"하며 금방 체념하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노후준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만 하다가 이렇게 늙고 말았어. 그러니 모아놓은 돈이 있길 하나, 그나마 전철이 무료라 이렇게 나와 세상구경도 하고 소일하는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면 답답한 집안에 처박혀 있다가 죽으라는 건데, 뭐 별수 있나." 멀리 시흥에서 왔다는 76세 노인의 말이다.
"
가난하던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게 누구네 피땀으로 이룬 건데, 이제 늙고 힘없는 늙은이들이라고 괄시를 하는 거야? 괄시를…."그러나 다른 한 노인은 울분이 솟구쳐 올라오는지 두 주먹을 치켜 올리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지하철 대합실엔 평소보다 노인들이 많아 보였다. 대합실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노인들은 오갈 데 없이 무료하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광화문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종로3가에서 내려 종묘공원을 찾았다.
밖으로 나서자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했다. 종묘공원에도 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인지 평소보다는 훨씬 숫자가 적었다. 노인들은 비 그친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장기바둑을 두기도 하고, 할 일 없이 공원 이곳저곳을 배회하거나 멍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다.
정부의 검토 보도에 울분을 터뜨리는 노인들그런데 한쪽에 30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벤치에 앉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을 중심으로 둘러서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손자 놈 때문에 걱정이야. 올해 대학 4학년 졸업반인데 등록금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할애비가 도와줄 능력도 없고….""대학은 나와서 뭘 해? 졸업해봐야 취직도 못 한다는데.""경제대통령 될 거라고 해서 찍어줬는데 말짱 도로묵이여, 도로묵."
노인들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노인들의 불만을 듣고 있던 노인 한 분이 조간신문을 꺼내들었다.
"여기들 봐요, 오늘아침 신문인데 우리 노인들이 무료로 이용하는 전철요금 제도를 재검토 하겠다고 나왔는데 본 사람 있어요?"노인의 말을 듣자 다른 노인들이 일제히 그 노인이 치켜든 신문을 주시했다.
"노인들 전철 무료로 타는 제도를 바꾼다고? 허허 그것 참, 그럼 이 종묘공원도 앞으로는 텅텅 비겠구만. 전철 요금 받으면 여기 오는 노인들 아마 10분지 1도 안 올 걸, 안 그래요?"이 노인이 한 마디 하자 다른 노인들도 이곳저곳에서 한 마디씩 거든다.
"우리 늙은이들, 이제 공원에도 못나오고 집안에 갇혀 숨 막혀 죽게 할 요량이구먼. 아무리 늙은이들이라고 이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거야?""대통령 누가 만들어 줬는데, 우리 노인들에게 뭐 해준 게 있다고 전철도 공짜로 못 타게 한다니. 내 원 참! 이건 배신이야 배신!""다 우리 늙은이들 자업자득이지 뭘 그래. 선거 때마다 늙은이들은 기권도 안 하고 꼬박꼬박 찍어줬잖아?"웅성거리는 노인들 속에서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혹시 4대강 삽질사업비가 부족한 거 아녀? 그러니까 우리 늙은이들 전철요금이라도 받아서 보태려고 하는 게지."어렵던 시절 노후 준비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가진 것 없이 서러운 처지가 되어버린 노인들. 그 노인들에게 하루 몇 천원의 전철요금은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 되는 듯했다. 정부의 노인 무료요금 개선 검토가 노인들에게 부담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되면 노인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