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사람은 죽으라는 겁니까?" 지난 11일 오후 서울 소재 대학병원의 4층 로비. 김영기(54)씨는 인터뷰 동안 절망과 분노 사이를 오갔다. 그의 아들 김재현(20)씨는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투병중이다. 재현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2006년 12월 16일에 갑자기 쓰러졌다. 고등학교로 배정받고 교복을 받으러 가던 날이었다.
치료는 4년째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3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지난 6일에는 면역 수치가 바닥까지 떨어지며 장출혈을 일으켰다. 중환자실로 옮기고 백혈구 수혈 처방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헌혈자를 구하기 위한 사투가 시작된 건.
처음 찾아간 곳은 인근 군부대였다. 하지만 구청 공문을 받아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구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부서에서 '우리 관할이 아니다' '그런 공문을 써본 적 없다'고 얘기했다. 8번을 더 전화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무작정 인근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고생 끝에 5명의 전경 헌혈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라고 당시 심경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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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혈자 찾아 삼만리 김영기씨 인터뷰(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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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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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김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윤성애(가명·44)씨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다. 남편 정현준(가명·48)씨는 백혈구 수혈을 받아야 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투병 중 폐렴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기 때문이다. 급히 인근 전경부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든 부대가 비상대기 상태였다.
결국 '백혈구 헌혈을 해주면 50만원씩 사례하겠다'는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모두 13명의 헌혈자를 구했지만 혈액검사에서 11명이 탈락했다. 노숙자, PC방 장기거주자 등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남편은 치료 중 세상을 등졌다.
헌혈자 찾아 삼만리... 정부와 병원은 나몰라라일반 헌혈과는 달리 백혈구 헌혈 관리 제도가 없어 환자와 가족이 고통을 받고 있다. 백혈구 수혈은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수 있는 방법이다.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항생제 효과도 없는 환자가 택할 수 있는 치료다. 하지만 헌혈자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개인이 직접 헌혈자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은 처방만 내릴 뿐이다. 헌혈자를 찾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복잡한 헌혈 절차도 문제다. 백혈구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병원을 3번 방문해야 한다. 혈액검사, 백혈구 촉진제 주사, 채혈 과정을 거친다. 헌혈 시간도 3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헌혈봉사자가 백혈구 헌혈을 기피하는 이유다. 결국 헌혈자를 구하지 못한 환자 가족은 매혈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 하지만 국가관리 제도는 전무한 상태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적십자사는 백혈구 헌혈 관련 통계 자료 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단지 병원에서 백혈구 헌혈을 진행하고 보험료 청구 내용을 토대로 한해에 1000-1500명 사이가 백혈구 헌혈을 한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환자와 가족들은 백혈구 헌혈자 관리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은영(38)씨는 지난 14일 "백혈구 헌혈 대기자 명단도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응급 상황에 환자가 헌혈자를 구하러 다닐 시간이 어딨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씨는 외사촌여동생 전내화(23)씨를 살리기 위해 백혈구 헌혈자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를 비롯한 일가 친척이 모두 조선족인 이유다. 연고는 물론 소속단체도 없다. 인터넷에 도움을 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거주지가 대구라는 점도 문제였다. 어렵게 헌혈 자원자를 구해도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올라가서 헌혈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헌혈을 위해서는 병원을 3번이나 방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헌혈자 관리제도 도입 시급... 정부는 '지금은 곤란... 기다려달라'환자는 고통 받고 있지만 관계 부처는 아직은 나서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공공의료과 김순희 사무관은 지난 15일 "아직 성분채혈백혈구 수혈의 의학적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 백혈구 촉진제 부작용에 대한 논란도 있다. 헌혈자의 건강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의학적 연구가 선행되고 객관적 자료가 나와야 정책을 법제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2010년 연구사업계획은 모두 확정된 상황이다. 다음 연구논의 시작은 빨라야 2011년부터나 가능하다. 혈액안전관리업무를 총괄하는 질병관리본부 혈액안전감시과 신영학 과장은 "정책 연구는 필요성이 있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산문제 등으로 모든 연구를 진행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도 법적 한계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 혈액관리본부 박규은 본부장은 "적십자사가 현재 법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백혈구 헌혈이 의료 행위로 규정되기 때문이다"라며 "보건복지부 공공의료과와 질병관리본부 혈액안전감시과에서 법적·정책적 개선이 선행 돼야 한다"고 했다.
박 본부장은 "하지만 백혈구 수혈은 실존하는 문제다.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 환자가 헌혈자를 구하러 다니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헌혈·수혈 윤리강령에도 어긋난다. 정부가 백혈구 헌혈자 정보를 관리 하고, 헌혈자 건강관리 규정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무엇보다 백혈구 치료 효능성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 작업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가능하다"면서 "지금처럼 환자가 직접 헌혈자를 찾아나서게 되면 환자나 환자 가족이 겪어야 할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사공 없는 정책... 사지로 내몰리는 환자들김영기씨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차라리 죽고 싶다'는 환자 보호자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백혈구 수혈 한 명 받는데 검사비와 사례비 등으로 80~90만원이 들더군요. 17명 수혈 받는데 1800만원 넘게 썼습니다. 건강보험 혜택도 없이 카드로 돌려 막았죠."허탈하게 웃는 김씨. "그래도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데 시도는 해 봐야죠"라며 담배에 불을 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