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은 자기랑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옛날 중학교 동창도 만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는 '기아(飢餓)대책' 사무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하고." 

"거기에서 함께 오라고 안 했잖아요."

 

"함께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전에도 만나면 아무래도 자기가 중학교 동창 같다면서 안부도 묻고 했거든. 자기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보면 무척 반가워할 거야."

"그럼 그렇게 하죠. 나는 기억이 없는데, 진짜 동창인지 확인도 하고, 사람이 많이 오간다는데, 혹시 다른 동창도 만날지 모르니까···."

 

지난 2월 초쯤 됐을 겁니다. 작년에 공직에서 정년퇴직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아이들과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을 찾아가 말동무도 되어주고, 목욕도 시켜 드리는 단체 사무실로 출근하는 지인이 한가하면 놀러 오라는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차에 전화를 받으니까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기다리다 아내가 쉬는 날 아침에 지인에게 전화해서 오후 3시쯤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아내와 동반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인은 시청에서 주민생활 지원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면서 마지막 여생을 홀로 외롭게 보내는 노인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을 무기 삼아 도전하는 자세로 자원봉사에 뛰어들었다고 하더군요.  

 

아내는 주인공, 나는 구경꾼 되다 

 

'기아대책' 사무실은 월명공원에서 은파 유원지로 이어지는 낮은 산자락 아래에 자리한 교회 건물 지하에 있었습니다. 눈에 익은 길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요. 예상대로 지인은 아내를 형수님 모시듯 깍듯이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40년 지기지우로 변하더군요. 동창임을 확인한 아내가 나이도 동갑이고 중학교 동창인데 구태여 존댓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하니까, 지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럼, 그럼!"을 연발했습니다. 동창끼리 경어를 사용하면 닭살이 돋는다나 어쩐다나···.

 

저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고, 시계를 45년 전으로 돌려놓은 두 사람은 학창시절 짝꿍을 만난 모습 그대로였는데요. 방송국 성우들이 드라마 대본 연습하듯 한 사람이 급우와 선생님들 특징을 얘기하면 농을 섞어가며 부드럽게 받았습니다. '맞장구친다!'는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오더군요.

 

대화를 반말로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단 30초도 걸리지 않았는데요. 여·야 회담과 남북대표 협상이 이런 식으로 순조롭게 타결된다면 세상에 고민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조금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화가 무르익어가니까, 주인공이 바뀌어 저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더군요.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어리벙벙했습니다. 먼저 함께 가자고 제의했으니 대화를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옆에서 말 박자나 맞춰주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굼벵이 같은 추어탕이 맛있다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니까 지인은 휴대전화기 번호판을 열심히 눌러댔고, 누군가와 연결이 되니까 빨리 오라며 욕설을 해대더군요. 저도 한때는 동창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키는 작지만, 얼굴이 곱고 체격이 좋은 친구가 "바쁜 사람을 왜 불러내는 거여!"라며 들어왔고, 5분쯤 있으니까 안경을 쓰고 몸이 빼빼하면서 무척 온순하게 보이는 친구가 손을 흔들며 들어왔습니다. 

 

음주운전으로 면허증을 빼앗겼다는 체격이 좋은 친구는 졸업 후 아내와 처음이고, 빼빼한 친구는 교회 모임에서 몇 차례 봤다고 하더군요. 대화는 체격이 좋은 친구가 면허증을 빼앗긴 사연부터 학교 다닐 때 속썩였던 얘기까지 다양하게 오갔습니다.

 

운수업을 했으면서도 음주운전을 하다 삼진아웃 되는 바람에 면허증을 빼앗겨 택시를 타거나 걸어 다닌다는 친구는 큰아들이 마흔이 다 되었고, 손자 손녀를 여섯이나 보았다며 껄껄 웃었습니다. 요즘은 낚시 다니는 게 일과가 됐다고 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요.

 

 추어탕과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는 아내 동창들. ‘젓갈하고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추어탕과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는 아내 동창들. ‘젓갈하고 친구는 묵을수록 좋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 조종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웃음과 함께 이어지는 대화는 그칠 줄 몰랐는데요. 빼빼한 친구가 배도 출출한데 뭐라도 먹어야 될 것 아니냐며 근처에 추어탕을 잘 하는 집이 있으니 가자고 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보신탕집은 옆길로도 지나가지 않으려 했고, 추어탕 잘하는 집이 있으니 먹으러 가자고 하면, "굼벵이처럼 징그러워요!"라며 저를 굼벵이 잡아먹는 아프리카 원주민 쳐다보듯 하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동창이 먹으러 가자니까 순순히 따라오더군요. 동창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까 곧바로 상이 차려졌습니다. 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지난날들을 확인하고, 또 하면서 다른 동창들 연락처와 소식을 주고받았는데요. 놀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간 저는 식당에서도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어탕과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는데요. 전문 음식점답게 음식이 맛깔스럽고 개운했습니다. 다들 맛있다며 그릇을 비우더군요. 아내도 한 그릇을 다 비우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다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식대는 추어탕 집을 소개한 친구가 냈습니다. 모 회사 건강식품 대리점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그는 생각지 않은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서인지 처음부터 헤어지는 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궁이에서 금방 꺼낸 군고구마처럼 구수하고 뜨끈뜨끈한 대화는 헤어질 때까지 이어졌는데요. 아내는 남편 덕에 반가운 동창들을 만나 쉬는 날 오후를 즐겁게 보냈으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집에 와서도 동창 얘기만 해댔습니다.

 

그런데 지인의 전화를 받고 갔다가 맛있는 추어탕까지 얻어먹었는데도, 저는 중요한 물건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처럼 가슴이 허전하더군요. 이상한 것은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도 누구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중학교동창#아내#추어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