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경찰은 김아무개씨 사건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성범죄 전력이 있는 김씨가 교도소를 출소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산의 한 여중생을 납치, 성폭행, 잔인하게 살해한 후 이웃집의 물탱크에 시체를 유기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발표했듯이 범인은 잡혔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범인이 잡혔으니 이제 끝인가? 이제 우리는 한동안 김아무개에게 품었던 분노와 증오를 망각 속으로 묻어둔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러다가 다시 비슷한 사건이 터지면 그를 향해서 분노하고 비통해 할 것인가?
나는 요 며칠 이어지는 김씨 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참담하고 답답했다. 사건이 터지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 사건의 본질은 감춰지고 자극적이고 흥미거리 위주의 기사만 늘어났다. 단적인 예로 김씨가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고 난 후 저녁식사로 자장면을 먹었단다. 그의 양부모와 친구 그리고 어릴 적 성장 과정이 양념처럼 곁들여졌다.
방송과 신문은 언제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것인가?그런 이야기를 해준 곳은 바로 방송과 신문이다. 나는 종종 결론을 짓는다. 말이 안 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괴물이라고. 그래서 내게 언론은 때로는 굶주린 괴물이다. 아니 언론은 항상 굶주린 괴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것도 어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먹을 것이 없으면 뒷골목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서 끼니 때마다 찾아오는 궁기(특종)를 채워줄 먹잇감을 찾는 괴물이다.
방송과 신문이 우리 사회에서 언론다운 모습을 갖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특히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니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 허용의 범주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김○○, 노무현, 한명숙. 잔인하든 흥미거리든 이슈가 되는 사안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다. 특히 지난해 세상을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조사 건만 해도 그렇다. 검찰은 노골적으로 고인의 피의 사실을 흘렸다. 거기에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분의 인권은 없었다.
언론은 모처럼 살이 토실토실한 먹잇감을 찾았다. 속칭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고인의 앞마당까지 촬영해서 대중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한번 맛을 들인 사람들은 더욱 자극적인 소식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자극의 정점은 부엉이바위에서 끝이 났다. 이 부분에선 보수니 진보니 편가르기를 하지 않았다. 20이 80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듯 이것 또한 사실이다.
때로 진실은 먼지만큼 작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조두순과 김○○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강호순 사건을 보도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복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수수 사건을 노무현 대통령식으로 터뜨리듯이 말이다. 같은 사안이라도 쓰는 이들의 입맛에 따라 기사의 관점은 천차만별이다. 이라크 파병이 그랬고 촛불 집회가 그랬고 쌍용자동차 파업이 그랬다. 기사는 보도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뉴스가 얼마나 자극적인가, 얼마나 선정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폭력적인가에만 촛점을 맞춘다.
가십거리가 주를 이루는 연예 뉴스만큼은 아니겠지만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기사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먼지만큼이나 작다. 진실은 언덕 너머에 있다. 넘어갈 생각도, 넘어오게 할 생각도 없다. 진실은 아예 없을 때도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테러리스트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잡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듯이. 그 역설도 가능하다. 범인이 잡혔다는 사실보다 범인이 누구냐가 더 중요하다. 그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오늘처럼 팍팍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언론이 할 일은 그것들을 사람들 앞에 놓아주기만 하면 된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비극이다개인적으로도 김씨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에 상당히 불만이 많다. 강호순이나 김씨 사건처럼 잔인한 성폭행 사건은 특히나 그렇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보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결국 보고야 말았다. 지금도 나는 강호순의 그 선량한(?)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선량한 얼굴로 인해 강호순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수많은 매체로 둘러싸인 환경은 어떤 소식이든 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실 우리 모두 그렇다. 컴퓨터를 끄고 핸드폰과 텔레비젼을 박살내고 산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산 속에서는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게 가능할까? 범인의 얼굴을 공개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단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범죄를 막기 위해서?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김길태가 저녁식사로 자장면을 먹었는지 짬뽕을 먹었는지를 알아야 하는가?
<시계 태엽 오렌지>의 주인공과 흉악범의 공통점
이 사건을 접하면서 얼마 전에 본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알렉스와 친구들은 방황하는 청소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코로바 우유를 마시며 갖은 악행을 일삼는다. 이유나 동기 같은 것은 없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결국 악행을 일삼던 알렉스는 친구들의 배신으로 감화원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세뇌교육을 받고 풀려나지만, 이번엔 피해자들에게서 고통을 받고 결국 창 밖으로 투신한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알렉스는 자신을 찾아온 정치인과 모종의 타협을 하고 루드비코 치료(인권을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치료법)를 받는다. 하지만 그가 악행을 하려고 하면 고통을 느끼는 교화 방식은 겉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성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교화하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 되고 나서도 악행을 일삼는다.
결국 이 영화는 악은 어떤 방법을 써도 악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원작자가 실제로 겪었던 사건을 소설로 썼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범한 네 명의 군인들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주인공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면에서 김씨보다는 강호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같은 남자로서 내게도 욕망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교육과 인성을 바탕으로 절제되고 참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 맘대로 발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채 피어보지도 못한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잔인하게 배설해 버린 자를 향한 나의 증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렇게 끔찍한 범죄의 속성이 혹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특히 공부방에서 이런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 그 순간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누구도 나를 향해서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그런 일이 없을 때와는 나를 대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이렇듯 김○○ 사건 같은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 내겐 한동안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비단 성폭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김○○과 강호순으로 대변되는 우리 안의 폭력과 모순은 무수히 많다. 편견, 차별, 인권 침해 등등. 그것들은 언제나 참기 힘든 욕망으로 치닿는다. 절제는 미덕이지만 인내를 필요로 한다. 차이는 필요하지만 차별은 필요없다. 다름과 틀림은 정답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수학 문제는 정답이 있지만 피부색은 정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피부색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식화된 이분법을 좋아하진 않지만 위에서 언급된 것들은 크게 강자/약자로 나뉜다. 이 틀 속에서 보면 남자인 나는 분명 강자다. 특히 한국 같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라는 이름은 타도해야 할 권력의 상징이다. 인권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더라도 남자는 대부분 강자이며 가해자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옹호론자가 아니다. 입학 상담을 하거나 가정 방문을 하면 시작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는 남편의 무능 혹은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알콜 중독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끼친다. 남자인 내가 생각해도 화가 나고 분노할 일들이 태반이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괴물을 지워야 한다앞에서 언급했듯이 강호순이나 김○○사건 같은 끔찍한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면 나는 한동안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마치 그 끔찍한 범죄를 내가 저지르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과 나는 분명 다르다고 속으로 무수히 되뇐다. 마치 세례를 받듯이 욕망 혹은 그런 것들을 깨끗하게 정화시킨 우물에 한동안 나를 빠뜨려 놓고 허우적대다가 빠져나오곤 한다. 그리고 속으로 수도 없이 당당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낸다. 사이코패스라고 규정되는 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스나 실제 인물인 강호순 같은 부류와 나는,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다르다고 말이다.
굳이 그런 설레발을 치지 않아도 그들과 우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면 여전히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그리고 그 심리적 영향의 대부분은 자신은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제 모습을 망각한 주류 방송과 언론이 안겨줬을 가능성이 높다. 방송과 언론은 이제 괴물이기보다는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혹시라도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김○○를 지우는 일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공부방(신흥동 푸른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