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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겨우내 움츠렸던 시간들을 벗어내고 또 다시 만난 여성문화유산연구회 회원들은 서울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이 마련되어 있는 '서울역사박물관'부터 시작해서 '경교장', '홍난파 가옥', '딜쿠샤 가옥'까지를 톺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철로는 5호선을 이용해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된다.  

우선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돌아보기 전에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 준비한  조선의 '한성도'자료를 보며 공부에 들어갔다.  서울이라는 명칭은 신라시대 경주의 옛 이름인 서벌(徐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서울 즉 한양, 그 중에서도 종로구 일대가 한반도의 수도로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였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 제공한 '한성도' 자료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 제공한 '한성도' 자료 ⓒ 박금옥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경복궁의 주산은(뒤쪽) 백악(산)이고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며 안산(앞산)으로 목멱산(남산)이 위치해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도읍을 정할 때 필수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따른 것이라 한다. 경복궁의 동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있고 이를 동궐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경희궁을 서궐이라고 부른다. 덕수궁도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철거되는 수난을 겪은 경희궁의 원래 자리는 지금의 역사박물관이 있는 곳이고, 박물관 바로 옆에 복원되어 있지만 그 복원은 아주 미비하다고 한다. 경복궁의 좌청룡으로 종묘와 낙산(타락산), 우백호는 사직과 인왕산이다. 그렇게 4개의 산을 이어 쌓은 성곽이 서울성곽이고 그곳의 4대문은 숙정문,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이며 또 4개의 소문으로 창의문(장의문), 혜화문, 광희문, 서소문이 있다. 그런데 서쪽에 있는 서대문과 서소문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며 그 이유가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 때는 한성부에서 도시 살림을 관리했는데 지금의 서울시청이 하고 있는 일이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도성안과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성저십리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성안은 종로구, 중구이고 성 밖은 마포구 용산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성동구, 성북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란다. 도면을 보며 해설을 듣고 박물관을 돌아보니 한양 서울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듯하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서울의 역사와 서울 사람들의 생활, 문화, 도시의 발달 등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경교장 강북삼성병원 건물의 입구역할로 전락해 있는 경교장. 사진 왼쪽의 2층에 20평 정도의 다다미 방 하나가 집무실로 복원되어 있다.
경교장강북삼성병원 건물의 입구역할로 전락해 있는 경교장. 사진 왼쪽의 2층에 20평 정도의 다다미 방 하나가 집무실로 복원되어 있다. ⓒ 박금옥

역사박물관을 나와 오른쪽 길인 서대문역 방향으로 5분쯤 걸어 오르면 사거리에 강북삼성병원이 나온다. 우리의 두 번째 목적지다. 누가 아파서 병원에 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무르면서 임시정부의 회의실, 집무실, 숙소로 사용하던 '경교장'이 있다. 그곳은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병원의 높은 빌딩 아래에 납작 엎드려 병원 현관구실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경교장은 소유주가 삼성생명이란다. 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 위기에 놓여 있던 것을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의 지난하고 힘겨운 노력 끝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받아 겨우 살려냈다고 한다.

 복원되어 있는 경교장 2층 입구. 오른 쪽 정면에 보이는 문은 병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복원되어 있는 경교장 2층 입구. 오른 쪽 정면에 보이는 문은 병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 박금옥

2층으로 올라가니 병원복도 한 쪽에 셋방살이 하듯 '백범기념실'이라는 명패가 천정에 달랑달랑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나라의 독립과 통일된 조국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임시정부의 주석까지 지낸 선생의 집무실 겸 사저의 복원이란 것이 참으로 옹색하고 초라해 보였다. 20평 남짓의 다다미방과 흉상이 전부다.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경교장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 온전한 복원이 필요한 당위성들을 설명해 주면서 정부의 무관심과 삼성의 사유재산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

 경교장에 복원되어 있는 20평 남짓의 다다미방 집무실.
경교장에 복원되어 있는 20평 남짓의 다다미방 집무실. ⓒ 박금옥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가 내세우는 경교장에 새겨진 역사적 의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이며 남북협상의 산실이고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 현장'이다. 이런 '경교장'이 제대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복원되어 시민들 품에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바람이라고 믿고 싶다.

경교장을 나와 병원건물 왼쪽 골목길로 걸어 오르면 맞은편에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복지재단이 나온다. 교육청과 연해 있는 서울복지재단의 담 끝자락 갈림길에 언덕을 향해 '홍파동 홍난파 가옥 100미터'라고 써져 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따라 고개 마루 같은 언덕길을 오르니 인왕산이 주택들을 앞에 세우고 솟아 있다. 길 끝처럼 보이는 곳에 벽돌이 주홍빛처럼 빛나는 '과자의 집'같이 단아한 건물이 단연 돋보이며 눈에 들어온다.

세 번째 목적지인 '홍난파 가옥'이다.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라 불리는 홍난파 선생이 1935년부터 194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곳이란다. 이 집은 1930년 독일인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서양식 근대가옥이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직계후손들이 관리를 맡아 하고 있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공연도 열린다고 한다.
'고향의 봄', '봉선화', '퐁당퐁당' '봄처녀'의 음계들이 살아 움직이며 춤출 것 같은 집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섰다. 그 곳에는 홍난파 선생의 생전 기록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홍난파 가옥.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홍난파 가옥.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박금옥

홍난파 선생은 친일파 명단에 올라 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에 후손들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 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들여져 현재는 유보상태에 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지도층의 행보는 일반 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홍난파는 음악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런 홍난파의 말년 친일행적은 꼬리표처럼 기록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다. 그의 친일이 적극적인 가담이 아니라 병마와 고문에 의한 강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사람들에게 끼쳤을 영향력은 무시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직계 후손들의 선조에 대한 마음은 십분 이해를 하고 싶었지만, 역사적 진실을 회피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홍난파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로서 당당한 진실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그의 음악세계를 사랑하고 추모하고 자랑할 수 있는 행복한 대한민국의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딜쿠샤 가옥' 1920년 대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이다. 많이 쇠락해 있다.
'딜쿠샤 가옥' 1920년 대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이다. 많이 쇠락해 있다. ⓒ 박금옥

 '딜쿠샤 가옥' 앞에 있는 나무 밑에 '권율도원수 집터'의 표지석이 있다. 
나무 뒤쪽의 골목으로 빠지면 바로 인왕산으로 오르는 성곽이 나온다.
'딜쿠샤 가옥' 앞에 있는 나무 밑에 '권율도원수 집터'의 표지석이 있다. 나무 뒤쪽의 골목으로 빠지면 바로 인왕산으로 오르는 성곽이 나온다. ⓒ 박금옥

 인왕산 서울성곽. 위의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인왕산 성곽 길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 쪽으로 걸어 내리면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이 나온다.
인왕산 서울성곽. 위의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인왕산 성곽 길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 쪽으로 걸어 내리면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이 나온다. ⓒ 박금옥

우리의 공식일정은 홍난파 가옥에서 마무리 되었다. 왔던 길 되돌아가면 서대문역이 가깝지만 근처에 있다는 '딜쿠샤 가옥'이라는 1923년 미국인에 의해 지어진 집을 보러 갔다. 홍난파 가옥을 지나 골목으로 직진해서 계속 오르면 막다른 골목 같은 곳에 2층으로 된 붉은 벽돌집이 연립주택 같은 형태로 서있다. 지금의 소유주는 종로구로 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여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당시로는 그림 같은 2층집에 걸맞은 이름이었겠지만 지금의 낡아진 형태로 보아서는 그 이름을 유추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앞 공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권율도원수집터'의 표지석도 보인다. 은행나무를 끼고 있는 좁은 골목 밖으로 나가니 인왕산으로 오르는 서울성곽길이 바로 나온다. 성곽으로 오르는 입구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되지만 오른 쪽에 사직동을 두고 10여분쯤 걸어 내려오니 사직단이 있는 사직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공원을 가로질러 나와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2시간여 동안 걸은 길이다.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이다.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홍난파가옥#딜쿠샤가옥#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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